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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담

미야베 미유키의 <지요코> 줄거리

by SpiderM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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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꽤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오래되긴 했어도 아직은 얼굴이 꽤 귀엽지? 색도 예쁘고, 사이즈가 작아서 다른 점원은 안 돼. 눈구멍 위치가 안 맞거든."

넌 몸이 작아서 꼭 맞을 거야, 라고 점장님은 기분 좋게 말했다. “친구한테 듣기로는 손님에게 풍선을 나눠 주는 일이라고 했는데요."

“맞아, 풍선 나눠 주는 일이야. 그때 이걸 입고 나눠 줘. 가족끼리 온 고객들은 아주 좋아할 거야."

과연 그럴까..하하,

직원용 탈의실 벽에, 무척 지쳤습니다. 라는 모습으로 기대어 있는 것은 핑크색 토끼 인형탈이다. 

 

점장님 말씀대로 테마공원에서 돌아다니는 보통 인형탈보다 전체적으로 작다는 느낌이 든다.

“이거 언제쯤 산 거예요?"

"한 오 년 됐나? 창업 오 주년 감사 바겐세일 때 사모님이 가져오셨지. 아사쿠사에서 사셨다나 뭐라나 그랬는데."

그때도 몸이 작은 직원이 이 탈을 쓰고 가게 앞에서 풍선과 캔디를 나눠 줬다고 한다.

“꽤 인기가 좋았어. 그래서 이번 십 주년 감사 대바겐세일에 또하게 됐지.”

오 년 전에는 이 인형탈도 새것이었다. 색깔도 훨씬 선명하고 귀여웠겠지. 엄마 손을 잡고 쇼핑하러 온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줬을것이다.

하지만 말이죠. 이젠 볼품이 없다구요.

 



오 년간 계속 창고 안에 처박혀 있었겠지. 햇볕을 쬐지 않아서색이 많이 바래지는 않았어도 대신 여기저기 잿빛 곰팡이가 피어있다.

 

두 개의 기다란 귀가 후줄근하게 풀이 죽어서 오른쪽 귀는 세워 놔도 금방 주저앉는다.

 

핑크색 몸뚱이 곳곳에 흰 반점이 퍼져있는 까닭은 창고를 청소하던 직원이 인형탈 곁에서 표백제가 묻은 대걸레를 휘둘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표백제가 묻은 곳만 핑크색이 없어진 것이다.

 

이는 인형탈을 창고 안에 그냥 방치했다는 뜻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두 개의 눈알은 기름때와 먼지가 뒤섞여 무척 뿌옇다.

“냄새가 고약해요. 진드기도 있을 것 같고."

내 말에 점장님은 대범하게 웃었다

“오늘 하루 햇볕에 잘 말리면 괜찮아. 먼지도 털어 버리고."

만져 보니 겉이 축축하다. 인형탈 뒤쪽을 더듬어 지퍼를 찾고 열어 보니, 안쪽은 더 축축하다. 

 

역겨워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말리면 괜찮아진다니까."

내가 말하기도 전에 선수를 치며 점장님은 두어 번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내일이야. 열시에 개점인데 아홉시까지는 사무실로 와. 잘부탁해."

인형탈을 손질할 생각이면 주차장에서 해, 거기가 볕이 잘 들어.

 

안도한 표정의 점장님은 황급히 사라지며 그렇게 말했다.

축 늘어진 인형탈과 단 둘이 남았다. 

 

화가 나서 인형탈 코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겨우 그 정도의 움직임에 속이 텅텅 빈 토끼는 구깃구깃 허물어지며 벽 쪽으로 쓰러졌다.

정말 싫다.

가난한 학생에게 아르바이트는 생명줄이다. 

 

괜찮은 자리가 있어, 하루에 만 엔이고 마트 바겐세일을 도와주는 거니까 힘들지도않아. 

 

그렇게 알려 준 친구의 얼굴이 그때만 해도 부처님처럼 보였다. 

 

하지만 취소하겠어, 넌 사기꾼이야, 인신매매범이야.

최소한 하루라도 여유가 있다면 이 꾀죄죄한 인형탈을 집에서 
빨았을 텐데. 

 

한숨만 나왔다.

“어머, 아르바이트생이야? 수고 많네."

탈의실에서 인형탈에 발을 집어넣고 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들렸다.

오동통한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띠고서, 딱 우리 엄마 나이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서 있다.

 

곧장 사물함으로 가서 문을 연다. 명찰에 '다나카'라고 적혀 있다.

“네, 하루만 일할 거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다나카 아주머니는 사물함에서 꺼낸 밝은 청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는 인형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혼자 입기 힘들어. 도와줄게."

잡아당기고 끌고 하면서 둘이 매달렸는데도 제법 힘들었다. 

 

가까스로 몸을 집어넣자 어느새 내 몸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시험 삼아 입어 본 것이라 탈까지 쓰지는 않았다. 인형탈 머리통이 후드처럼 등에 늘어졌다.

"덥고 무거워서 어깨가 많이 걸릴 거야. 걸을 때는 발밑을 조심하고, 평소보다 두 배는 몸집이 커지니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 부딪치는 일이 많아.”

실감 나는 충고였다.

“아주머니도 인형탈을 쓰신 적 있어요?"

아주머니는 좁은 탈의실이 울릴 만큼 밝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럼, 오년 전엔 내가 이걸 썼어."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도 골격이 작은 편이다.

“오 년 사이에 이렇게 뚱뚱해졌지."

아주머니는 볼록한 배를 탁탁 두드렸다. 말씀하신 대로 살이 꽤쪘다.

“십이 킬로그램이나 쪘지뭐야. 그런데도 점장님은 나보고 다시입어 보라는 거야. 무리지.

 

하긴 다른 직원들은 더 무리였겠지만, 어차피 행사에 맞춰 아르바이트를 쓰기로 했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거 새로 오는 아르바이트에게 입히는 걸로 결정 났지."

미안해, 라며 밝게 사과한다.

 

나는 헤헤, 하고 애교 떨듯 웃으면서 속으로는 토끼 씨나 제대로 빨아 놓을 것이지, 하고 원망했다.

 

어제 정성껏 손질하기는 했어도 역시나 인형탈 안쪽은 축축하기만 하다.

 

팔과 다리는 피부가 직접 닿아 벌써부터 간질간질하다.

"머리도 써 볼래? 미리 걷는 연습도 해 둬야지.”

다나카 아주머니가 인형탈 머리를 들어 주셨다. 나는 몸을 배배꼬아 기어들어 가듯 토끼머리를 푹 뒤집어썼다.

“어때? 시야가 좁아져서 좀 무섭지? 처음에만 그럴 거야."

눈구멍 위치에 두 눈을 맞추고 탈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사물함이 늘어서 있고 철망에 갇힌 유리창이 보인다. 

 

확실히 시야가 좁아지긴 했지만 생각보다 덜 갑갑하다. 

 

그보다는 차오르는 숨이 불안했다. 

 

공기구멍은 턱 밑에 한 개 있는 게 고작이다.

"아이구, 귀여워라."

다나카 아주머니는 기뻐했다. 사람이 움직이는 낌새와 함께 대각선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밝은 청색 유니폼이 어디에도 없다.

대신 이상한 게 보였다. 몽실몽실한 회색 털 뭉치였다. 굉장히 크다. 

 

다나카 아주머니와 비슷한 사이즈다. 그게 내 옆에 서 있다.자세히 보니 곰 인형탈이다.

"아주머니?"

"나 여기 있어. 잘 안 보여?"

회색 곰 인형탈이 아주머니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느릿느릿 움직여서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주머니? 이게 다나카 아주머니라고? 왜 탈을 쓰고 있지? 저건 언제 쓴 거야?

"저기......."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회색 털을 만져 보려는데 몸이 비틀거린ek.

"괜찮아?"

아주머니 목소리로 말하는 이 회색 곰이 넘어지려는 나를 붙들어 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잠깐만 이것 좀 벗겨 주세요!"

나는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토끼머리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눈앞에 아주머니가 서 있다.

 

밝은 청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통통하게 살이 찐 아주머니가 서 있다.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뒤로 물러났다.

나는 숨을 멈췄다.

"왜 그래? 속에 뭐라도 붙어 있었어? 벌레야?"

다나카 아주머니의 질문을 무시하고 한 번 더 토끼머리를 썼다.

뒤집어 쓸 때 눈을 감고 말했다.

"아주머니, 거기서 움직이면 안 돼요!"

"응? 뭐라고?"

눈을 떴다. 역시나 회색 곰이 서 있다.

"왜 그러는데?”

아주머니의 목소리다. 회색 곰은 뭐야, 사람 놀라게, 라는 몸짓을 하고 있다.

인형탈 속에서 내 입은 떡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았다.

"잠깐만 돌아다니고 올게요."

손으로 벽을 짚으며 비틀비틀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전부가 인형탈을 쓰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핑크색 토끼인형탈을 쓰고 눈구멍으로 밖을 보고 있으면,

출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인형탈을 쓰고 있는 내 눈에는 봉제인형의 행진으로 보였다.

 

이 사람은 고양이, 저 사람은 너구리. 원숭이님도 있네. 꼬리도 제대로 달려 있군.

 

직원은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기 때문에 인형탈들은 귀여운 목소리로 떠들고, 여자처럼 웃는다.

 

당연히 동작도 여성스럽다. 그래서일까. 뭔가 좀 수상쩍은술집에 온 느낌이었다.

 

이런 걸 코스튬플레이라고 했던가? 원래는 세일러복이나, 간호사 복장일 텐데.

 

어쨌든 나는 여러 개의 봉제인형 무리에 뒤섞여 마트 입구에 도착했다.

점장님이 있다. 가게 앞에 걸 장식물을 올려다보고 있다.

 

점장님 옆에 사다리가 있고, 그 위에 서 있는 남자가 '창업 십 주년 대감사이벤트'라고 인쇄된 간판의 위치를 조정하고 있다.

"조금 더 올려. 아냐, 너무 올라갔어. 수평으로, 수평으로."

 

목소리가 점장님이다.

"이렇게요? 이 정도면 됐어요?"

대답하는 목소리가 남자여서 사다리 위의 사람이 남자임을 알았다.

둘 다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봉제인형도 아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점장님은 로봇이다. 어, 그러니까 이건 건담 아닌가? 사다리 위의 남자는 뭘까.

 

전대물 분장 등을 이용해 특수 촬영한 아동용 액션 드라마인데. 터보 레인저였나?

"점장님!"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건담이 고개를 돌린다. “음, 잘 어울리는군.”

나는 토끼머리를 쑥 벗었다. 

 

그러자 건담과 터보레인저가 사라지고 점장님과 사다리 위의 남자가 보인다. 

 

점장님은 하얀 와이셔츠에 줄무늬 넥타이를, 사다리 위의 남자 직원은 작업복 차림이다.

 

나보다 어려 보였다.

토끼머리를 다시 썼다. 오, 건담과 터보레인저가 부활했다!

“왜 그래? 감촉이 안 좋아?"

"그렇진 않아요." 나는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눈을 깜빡여 눈에 들어간 먼지를 털어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잠깐만요." 뒤로 빙 돌아 탈의실로 가려는데, 점장님 목소리가쫓아온다.

"어디 가는 거야? 조금 있으면 풍선 나눠 줄 시간이야!"

탈의실에는 거울이 있다. 나는 거울이 보고 싶었다. 

 

내가 어떤모습인지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직원들은 모두 매장으로 나가서 탈의실에는 아무도 없다. 

 

토끼머리를 쓴 상태로 천천히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토끼 봉제인형이 서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입고 있는 것과는 색깔이 다르다.

 

거울 속의 토끼는 흰색이다. 귀 모양도 다르다.

 

오른쪽 귀가 한가운데서 반으로 꺾여있다.

그리고 나는 이 흰 토끼를 본 기억이 있다. 이건, 이건 정말 반갑다.

그래, 지요코다.

어렸을 때 무척이나 아꼈던 토끼인형이다. 언제나 같이 잤다. 

 

공원으로 놀러 나갈 때는 업고 다녔다. 

 

가족여행에도 데려갔다.

검고 둥근 두 개의 눈. 

 

왼쪽은 원래부터 붙어 있던 플라스틱 눈이었고 오른쪽 눈은 아빠의 코트 단추다. 

 

지요코를 데리고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쪽 눈이 빠졌다. 여섯 살 때의 일이다.

“지요코 눈이 없어졌어."

엉엉 울면서 소란을 피우다가 엄마에게 야단맞았다.

 

나를 달래려고 엄마는 단추를 눈동자 대신 꿰매 주셨다.

 

그래서 양쪽 눈 크기가 살짝 다르다.

거울 속의 흰 토끼는 그런 것까지 지요코를 꼭 닮았다.

양쪽 팔을 내려다봤다. 인형탈을 통해 본 내 팔은 지요코의 것이다. 

 

흰털이 닳아서 군데군데 빠져 있다. 해진 손목 틈새로 솜이 보인다.

이건 지요코야. 틀림없어.

지요코를 잊고 산지 얼마나 됐을까.

지요코와 놀고, 끌어안고 잠들지 않게 된 초등학교 5, 6학년까지는 내 방에 있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어느새 지요코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낡아 빠진 흰 토끼 인형을, 이런 건 어린애나 좋아하는 거야, 라면서 쫓아냈다. 

 

지금은 지요코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뭐든지 절약하는 분이니까 버리지 않았을 텐데, 분명 어딘가에 잘 보관하고 계실 것이다. 

 

나중에 알아봐야지!

오랜만이네. 잊어버리고 지내서 미안해. 나 자신을 끌어안고 어렸을 때처럼 지요코를 안아 주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도 나랑 같은 게 아닐까.

직원들이 입고 있는 인형은 그들만의 지요코였던 것 같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어렸을 때 무척 좋아했던 장난감.

 

몇 시간이고 함께 놀았던 상대 곁에서 잠들고 꿈에까지 찾아와 준 소중하고 소중한 상상 속의 친구.

 

아이들에겐 지금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완벽한 친구.

이 핑크색 토끼 인형탈을 입으면 그것이 보인다.

나는 황급히 매장으로 돌아왔다. 금전출납기 앞에 서 있던 다나카 아주머니가 연신 키패드를 누르고 있다.

“다나카 아주머니!"

"네! 어머." 다나카 아주머니가 턱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를 이상한 여자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지. 해보자.

"아주머니는 어렸을 때 회색 곰 인형 좋아하셨죠?"

아주머니가 이번에는 온몸으로 물러났다. 계산대에 있던 여자가 대신 대답했다.

"어머. 그게 무슨 소리야? 새로 유행하는 점 같은 거야?"

"네, 비슷한 거예요."

"난 귀가 긴 강아지 인형이 친구였어. 다섯 살 생일에 선물받은 거야. 결혼했을 때도 가져가서 남편이 웃었지만 지금도 가지고 있어."

그 아주머니는 기다란 귀가 아래로 처져 있는 강아지 인형으로 보였다. 확실히 기다란 털이 조금 홀쭉하기는 해도 해지거나 더럽지는 않다. 지금도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점에 그렇게 나왔어?"

"그럼요."

나는 의기양양하게 가게 앞으로 나왔다. 점장님은 아직도 거기서 있다. 좀 전과 똑같이 건담이다. 마이크를 확인하고 있다. 

 

“점장님은 건담을 좋아하시나 봐요?"

"뭐?" 점장님의 눈동자가 커진다. “어떻게 알았지? 나야 퍼스트 건담 세대였으니까. 엄청 좋아했지."

“얼굴에 쓰여 있네요."

그런가? 하고 고개를 뒤튼다. 건담이 고개를 뒤튼다. 그 모습이 꽤 귀엽다. 그런데 퍼스트건담 세대치고는 점장님 나이가 제법 있다. 오타쿠였던 걸까.

그날 하루 종일 풍선을 나눠 주며 온갖 봉제인형을 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캐릭터 인형도 있었다. 마트를 찾는 손님들마다 뭔가를 입고 있다. 점장님처럼 봉제인형이 아닌 경우도 적잖았다. 젊은 여자가 닌자처럼 입고 온 것도 봤다. 아카카게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으로도 제작된 1960년대 인기 닌자 만화였던가. 바비 인형과 리카짱일본판 바비 인형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토끼머리를 벗었더니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서 더욱 놀랐다!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는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은 야구선수 모습을 했는데, 이상하게 팔락팔락하니 얇아 보였다. 저게 뭘까, 하고 보다가 그림 딱지란 걸 깨닫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림 딱지는 나이 든 남자가 많았다. 스모 천하장사 그림 딱지도 자주 보였다.

추억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린 장난감들. 버려진 것들이 더 많겠지.

 

잠깐 봐서는 뭔지 알 수 없을 만큼 더러운 것들은 틀림없이 그런 장난감이다.

다나카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인형탈을 쓰고 돌아다니기란 쉽지 않았다. 

 

휴식시간이 자주 주어졌다. 사무실 직원에게 부탁해 접착제를 빌렸다. 

 

우리 지요코의 해진 곳을 고쳐 주고 싶어서다. 

 

꿰매고 싶었는데 인형탈을 쓴 채로 섬세하게 바느질을 하기란 무리였다.

“멀쩡한데 뭐하려고?"

접착제를 건네주던 직원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탈의실로 돌아와 지요코에게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오후 세시가 되자 지칠 대로 지쳤다. 

 

한편으로는 인형탈과 장난감의 대행진에 익숙해졌다. 

 

누가 내 곁으로 오든 태연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며 풍선을 내밀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 사람, 평범한 아이가 보였다. 

 

그쪽이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나는 깜짝 놀랐다. 

 

중학교 1학년쯤 되었을까. 

 

턱 한가운데가 살짝 들어간, 고집스러워 보이는 소년이다. 

 

티셔츠에 청바지, 유명 브랜드의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일요일이었고, 마트에는 문구류도 많다.

 

중학생이 혼자 오는 것이 이상할 리 없다. 

 

소년이 손님들 틈에 섞여 매장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눈으로 좇았다.

저 아이에겐 어렸을 때 소중히 간직했던 장난감이 없는 걸까. 지금도 전혀 없는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다시 열심히 풍선을 나눠 줬다.

한 시간쯤 지나고 탈의실에서 좀 쉬려는데 사무실이 어수선하다. 토끼머리를 벗고 지나가던 직원에게 물었다.

"좀도둑을 잡았어."

직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중학생인데 아주 상습범이야."

불현듯 조금 전에 지나간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소년이 떠올랐다.

"경찰에 신고했어요?"

"글쎄, 일단 부모부터 불러야지.”

잠시 후 나는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며 땀을 닦고, 인형탈을 고쳐 입은 후 마트 앞으로 나갔다. 

 

택시 한 대가 갓길에 선다. 여자 혼자 내렸다. 

 

그 여자도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다. 

 

인형탈 같은 건 입지 않았다. 

 

택시 기사는 마그마 대사 1960년대 일본에서 인기를 끈 모험 만화의 주인공 로봇로 보였지만, 여자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다.

턱이 그 소년을 닮았다.

그 애 엄마로군.

여자는 마트 안으로 사라졌다. 

 

언짢아 보이는 표정은 로 인파가 들끓는 일요일의 마트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손님은 더욱 늘어났다.

 

풍선이 떨어져도 전단지를 나눠 주거나, 아이들과 일일이 악수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여섯시면 끝이다. 슬슬 시간이 다 됐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여자와 소년이 나왔다.

역시 엄마와 아들이었다. 나란히 걷고 있으니까 정말 많이 닮았다. 


두 사람은 무언가에 눌린 것처럼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저러다간 턱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을 텐데.

둘은 빠른 걸음으로 내 곁을 지나갔다. 앞뒤 살펴보지 않고 걸어오는 바람에 부딪칠 뻔한 걸 간신히 피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두 사람 등에 이상한 게 붙어 있다.

먼지 덩어리일까. 아니다. 시커먼 털 뭉치 같다. 검고 둥실둥실한 게 어쩐지 기분 나쁜 생김새다.

깜짝 놀라 토끼머리를 벗었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쫓아 몇 걸음 다가섰다.

소년의 티셔츠와 엄마의 블라우스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다.

다시 토끼머리를 썼다. 그러자 두 사람 등에 달라붙은 검은 것이 보인다. 

 

이번에는 모양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다. 

 

손처럼 생겼다.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돋은 여윈 손이다. 

 

손끝이 소년과 어머니의 어깨를 붙잡고 있다. 

 

거기다 굼실굼실 움직이고 있다. 

 

등에 거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오싹해져 진저리가 났다.

저게 뭘까. 뭐든 간에 나쁜 거란 생각이 든다.

장난감이나 인형을 입고 있는 사람들 뒤에는 저렇게 생긴 검은손이 붙어 있지 않다. 

 

마트에 온 누구도 저렇게 기분 나쁜 손에 씌지 않았는데.

탈의실에서 인형탈을 벗어 벽에 세워 두었다. 구깃구깃한 핑크색 토끼는 멍청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그게 뭘까? 나한테 뭘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니?"

물론 인형탈은 대답이 없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엄마와 아들의 등에 달라붙어 있던 기분 나쁜 검은 손, 세상에 떠돌고 있는 나쁜 손에 대해서. 누구든 그 손에 붙잡힐 위험이 있다. 

 

그 손에 붙잡히면 나쁜 짓을 하게 된다. 물건을 훔치는 것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는 건, 몸에 두르고 있는 인형과 장난감이 지켜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언가를 소중히 여겼던 추억.

무언가를 좋아했던 추억.

사람은 그런 기억들에 의해 지켜지며 살아간다. 그런 기억이 없는 사람은 서글프리만큼 간단하게 검은 손을 등에 짊어지게 된다.

이 핑크색 토끼 인형탈은 내게 그것을 보여 주었고 가르쳐 주었다.

“너 참 대단하구나." 인형탈에게 말했다.

오년 동안 창고에 처박혀 있으면서 탄 무언가가 들어왔던 것이다. 

 

나쁜 것이 아닌 아주 깨끗한 무언가가 그것이 인형탈 속에 쭉 살아 숨 쉬며 신비한 힘을 주게 된 게 아닐까.

이거 갖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점장님과 교섭해서 싸게 팔라고 해 볼까. 

 

앞으로도 도시에서 낯선 이들과 뒤섞여 살아가야 하는 나에게 이 인형탈보다 마음 든든한 무기는 없으리라. 

 

쓰기만 해도 나쁜 사람을 분별할 수 있다.

그때였다. 벽에 기대어 있던 인형탈 머리가 천천히 기울었다. 

 

나는 만지지 않았다. 

 

내가 움직인 것이 아니다.

"그러지 마."

인형탈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무서워져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토끼 인형탈은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저어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나는 손대지 않았다.

"알았어, 안 그럴게."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나에겐 지요코가 있잖아."

핑크색 토끼가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요코, 지요코, 하고 떠들어대자 엄마는 당황한 모양이다.

“지요코라면 창고에 있어."

"얼른 가져와!"

아, 다행이다. 엄마가 지요코를 잘 보관해 주었다. 잘됐어. 그리고 미안해 지요코, 창고 같은 데다 가둬 놔서.

미안해, 깨끗이 잊고 살아서.

"여보세요, 가져왔어.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니?"

“지요코는 무사해?"

“무사하고 뭐고...... 좀 더러워.”

"손 있는 데가 좀 해지지 않았어?"

엄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해진 데를 누가 접착제로 붙여 놨네. 네가 한 거니? 제대로 못 했구나. 

 

솜이 비어져 나왔어. 근데 언제 한 거니? 접착제로 붙인 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좁은 아파트 벽에 대고 힘껏 웃었다.

“엄마, 이번 주말에 내려갈 테니까 지요코를 햇볕이 드는 곳에 둬. 꼭 그렇게 해야 해."

"너 지금 무슨 말하는 거니? 괜찮은 거야?"

괜찮아, 난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요코가 생각나서 데리러 가려고!"

뜻하지 않게 높은 일당보다 더 좋은 선물을 받았다.

그 핑크색 토끼 탈은 또다시 창고에 갇힐 것이다. 언제 다시 밖으로 나올까. 

 

하지만 여러분, 만일 시내 마트에서 인형탈을 쓰고 일하게 된다면 제 이야기를 꼭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과연 무엇이 비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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