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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 (상) - 2/10

by SpiderM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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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25일의 그 기묘했던 오후를,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세찬 비에 떨어진 은행잎이, 잡목림 사이로 난 오솔길을 말라버린 시내처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양을 쫓는 모험 

 

무라카미 하루키 - 양을 쫓는 모험

 

나와 그녀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그 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낙엽을 밟는 두 사람의 발소리와 날카로운 새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그녀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별거 아니야"라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조금 앞질러 가다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웠다. 나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항상 기분 나쁜 꿈을 꾸는 거야?"

"자주 그래. 대개는 자동판매기에서 거스름돈이 나오지 않는꿈이지만 말이야."

그녀는 웃으며 내 무릎에 손을 얹어놓았다가 치웠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제대로 말할 수가 없어.”

그녀는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땅바닥에 버리고, 운동화로 신중하게 밟아꼈다.

"진짜 말하고 싶은 건 제대로 말할 수 없는 법인가 봐. 그렇게생각 안 해?"

"모르겠어"라고 나는 말했다.

푸드득 소리를 내며 새 두 마리가 지면으로부터 날아오르더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져갔다. 우리는 한동안 새가 사라진 언저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마른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도형을 몇 개 그렸다.

"너와 함께 누워 있으면, 가끔 아주 슬퍼져."

"미안하게 생각해"라고 나는 말했다.

"네 탓이 아니야. 더군다나 네가 나를 안고 있을 때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그런 일은 아무래도 좋아. 내가…………." 그녀는 거기서 갑자기 입을 다물고 천천히 땅바닥에세 개의 평행선을 그었다. “모르겠어."

“특별히 마음을 닫고 있겠다는 생각은 없어.” 나는 조금 사이를 두고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 자신도 아직 제대로이해할 수 없을 뿐이야.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되도록 공평하게파악하고싶거든.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현실적이 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겠지."

"얼마만큼의 시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1년으로 끝날지도 모르고, 10년이 걸릴지도 모르지.”

그녀는 작은 나뭇가지를 땅바닥에 버리고, 일어서서 코트에 붙은 마른풀을 털어냈다. “저, 10년이란 세월이 영원처럼 느껴지지 않아?"

"글쎄"라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숲을 빠져나가 ICU의 캠퍼스까지 걸어가 여느 때처럼 라운지에 앉아서 핫도그를 먹었다. 오후 2시였는데, 라운지의 텔레비전 화면에는 미시마 유키오의 모습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 비치고 있었다. 볼륨이 고장 난 탓에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는데, 어쨌든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핫도그를 다 먹고 나서, 커피를 한 잔씩 더 마셨다. 한 학생이 의자에 올라가 볼륨 버튼을 잠깐 만지작거리더니, 단념하고 내려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너를 원해"라고 나는 말했다.

"좋아"라고 그녀는 말하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아파트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내가 문득 잠에서 깨었을 때, 그녀는 담요 속에서 가냘픈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난로에 불을 붙이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였다. 하늘 한가운데에는 새하얀 달이 떠있었다.

그녀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렸다가 물을 끓이고 티백으로 홍차를 만들어 둘이서 마셨다. 설탕도 레몬도 밀크도 넣지 않은그냥 뜨거운 홍차였다. 그러고 나서 담배 두 개비에 불을 붙여서 한 개비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뿜어내기를 연거푸 세 번 하고 나더니 한바탕 기침을 했다.

"있잖아, 나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어?"라고 그녀가물었다.

"너를?"

"응."

“왜 그런 걸 묻지?"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손끝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그저 그냥."

"없어"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정말."

“뭣 때문에 내가 널 죽여야만 하는 거지?"

"그러네" 하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내가 깊이 잠들었을 때 누군가가 날 죽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뿐이야.”

"나는 사람을 죽일 타입은 아니야.”

"그래?"

“아마도.”

그녀는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남아 있던 홍차를한 모금 마신 후에,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스물다섯 살까지 살 거야"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죽을거야."

1978년 7월, 그녀는 스물여섯 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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