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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담

사랑의 끝 푸른 두건

by SpiderM 2024.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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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담은 동성애를 그린 <푸른 두건>입니다. 과거 일본은 고대 그리스 시절 만큼이나 우리나라에 비해 동성애가 성행했던 나라입니다. 물론 오해를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 글은 동성애를 다룬 일본 청년들의 한을 그려내는 소문이자 기담입니다. 일본으로 떠나간 조선 통신사의 기록에 실린 것을 보면 일본 여인들이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모습과 동성애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연의 이면에는 전쟁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여자들을 데리고 전장으로 나갈 수 없었던 다이묘 (영주, 성주)들은 욕구를 풀기 위해 어른 시동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또한 충성심을 받아내기 위해 그랬다는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 문학이나 기담에 동성애를 다룬 것들이 유독 많습니다. 지금도 일본 청소년들과 사람들 사이에는 여장에 대한 관용과 순정만화들이 많고 팬덤도 엄청납니다. 오늘 이야기 <푸른 두건>은 한 남자를 사랑한 남자의 종말에 대한 사연입니다. 함께 보시죠.

 


1. 가이안 선사와 마을 사람들

 

깊은 산 속 버려진 사찰
깊은 산 속 버려진 사찰

 

깊은 산속 사찰에서 하안거를 마친 이름 높은 승려 가이안 선사는 15세에 출가해 전국을 떠돌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터득했다.

 

산을 내려가 평소처럼 푸른 두건을 매고 지팡이를 짚고 길을 가던 중 해가 지고 말았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가야겠다."

마을에 들어선 선사는 길에서 마주친 아낙네를 보고는 공손하게 합장을 했다. 하지만 아낙네는 초라하고 거친 행색의 스님을 보고는 기겁했다.

"산 괴물이 내려왔어요."

아낙네가 비명을 지르자 곧 건장한 마을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가이안 선사를 둘러쌌다. 살기등등한 표정의 마을 청년들을 본가이안 선사가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소승은 떠돌이 행각승이외다. 여러분을 해칠 의도는 없소이다.”

가이안 선사가 말하자 촌장인 듯한 늙은 사내가 나서서 마을 청년들을 뜯어말렸다.

"공연한 오해로 부처님의 제자를 놀라게 했습니다. 사죄의 뜻으로 오늘 밤 저희 집으로 모시고 싶습니다만….”

가이안 선사는 촌장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배불리 먹은 가이안 선사는 차를 마시면서 촌장에게 물었다.

"아까 저를 본 마을 여인이 산 괴물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무슨 곡절이 있습니까?”

한숨을 쉰 촌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내려오신 산에는 원래 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인근 호족의 위패를 모시던 곳인데, 그 집안이 몰락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죠. 하지만 절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많았던 스님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주지 스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수행을 열심히 하셔서 주변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마신 촌장이 말을 이어갔다.

"작년 봄인가, 근처의 다른 절에서 초청을 받으신 주지 스님께서 돌아오시는데 어떤 소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동자승입니까?"

가이안 선사의 물음에 촌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흉년에 부모가 모두 굶어 죽어서 절에 맡겨진 아이라고 하더이다. 문제는 그 아이의 외모가 워낙 아름다워서 그랬는지 주지스님께서 늘 옆에 끼고 계셨습니다. 둘이 동침을 한다는 민망한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가이안 선사가 쯧쯧 혀를 찼다. 물론 동성애는 흔한 일이라 크게 문제 될 게 아니었지만 수행을 하는 승려라면 문제가 달랐다.

"올봄에 그 아이가 덜컥 병에 걸려 버렸습니다. 결국 소년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절에 올라가서 장례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도무지 장례를 치를 생각이 없으셨던 겁니다. 죽은 소년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뺨에 얼굴을 비비면서 슬퍼하고만 있었죠. 보다 못한 제가 매장을 할 건지 아니면 화장을 할 건지 여쭤봤더니 절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 뒤에 올라갔던 마을 사람이 끔찍한 얘기를 전해 줬습니다. 주지 스님께서 죽은 소년을 어루만지고 쓰다듬다가 시신이 썩어 들어가자 마침내 핥아먹었다는 겁니다. 그걸 본 마을 사람이 한걸음에 달려와서 제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가이안 선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람 고기에 맛을 들렸는지 그날 이후부터 밤마다 마을 주변의 묘지를 돌아다니면서 시신들을 파내 먹어치우고 있습니다."

하소연을 들은 가이안 선사가 혀를 찼다.

얘기를 마친 선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촌장에게 말했다.

 

"소승이 하안거를 마치고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돌았는데 소승이 애욕에 빠져 미친 주지 스님을 성불하도록 돌봐드리겠습니다."

촌장이 기쁜 얼굴로 연신 합장을 했다.


 

2. 죽은 동자승과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차를 마시고 잠자리에 든 가이안 선사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푸른 두건을 쓰고 지팡이를 든 채 떠날 차비를 했다.

 

가이안 선사는 미친 주지스님이 사찰로 향했다. 

한때는 제법 융성했는지 대문은 문루까지 갖췄고, 부처님을 모신 본당과 종각도 꽤 큰 편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내버려 둔 듯 기둥과 처마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고, 상야등(밤에 불을 밝히는 석등)은 이끼에 뒤덮여 있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몇 번이고 큰 소리로 외치자 낡고 꾀죄죄한 승복을 걸친 늙은 주지 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시오?"

“소승은 떠돌이 행각승인데 하룻밤 머물기를 청합니다.”

공손하게 합장을 한 가이안 선사가 얘기하자 늙은 주지 스님이 광기로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그네에게 먹일 음식도 없고, 문밖으로 나가서 쭉 내려가면 골짜기 아래 마을이 있을 걸세. 그곳에서 먹을 것과 잠자리를 구하게."

"먹을 것은 괜찮으니 비바람을 피할 곳만 구하고자 합니다.”

가이안 선사의 말에 주지 스님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 그렇다면 본당이든 별채든 편한 곳에 계시구려. 하지만 이곳에 있다가는 안 좋은 일을 겪을 수도 있음을 명심하시오."

얘기를 마친 가이안 선사는 부처를 모신 본당 안으로 들어갔다. 게다를 벗고 들어간 선사는 지팡이로 불상과 문에 드리워진 거미줄을 걷어 내고, 보따리를 베개 삼아 누웠다.

 

먼발치에서 가이안 선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늙은 주지 스님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3. 정체를 드러낸 주지 스님

 

애욕에 눈이 먼 주지 스님
애욕에 눈이 먼 주지 스님

 

해가 떨어지자 절 안은 온통 어둠에 뒤덮였다. 눈을 감고 누워 잠든 척하던 가이안 선사는 벌떡 일어나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조용히 염불을 외우면서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잠시 후 사람인지 짐승의 숨소리인지 알 수 없는 씨근덕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본당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분명 여기서 잠든 걸 봤는데 어디로 간 거지?"

코앞에서 주지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가이안 선사는 꼼짝 않고 염불을 외웠다.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든 주지 스님은 광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며 본당 안을 샅샅이 살폈지만, 바로 코 앞에 있는 가이안 선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이안 선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본당 안에 울려 퍼진 가이안 선사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주지 스님은 소리쳤다.

“어디 있는 게냐? 썩 나와라!"

"나는 이 안에 있소이다. 맑은 눈을 가졌다면 능히 찾을 수 있을 것이오."

가이안 선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지 스님은 괴성을 지르면서 본당 안을 마구 헤집었다. 심지어 부처상을 칼로 찍기도 했다. 하지만 가이안 선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주변으로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리니 사찰 안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고 믿은 것 같았다.

 

짐승처럼 헐떡거리며 괴로워하던 주지 스님은 본당 앞에 걸터앉았다. 


4. 강월조송풍취 영야청소하소위

 

해가 뜨는 것을 본 가이안 선사가 외우던 염불을 중단하자 주지 스님의 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허탈해진 주지 스님은 손에 들고 있던 칼과 몽둥이를 던져 버렸다.

"첫눈에 범상치 않아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 뉘시오?"

"떠돌이 행각승이외다. 무릇 부처의 제자라 함은 애욕은 물론, 인간의 모든 감정을 버리고 오직 해탈의 길을 가야만 하는 법. 스님은 어쩌다가 이런 지경이 되신 것이오?”

준엄하면서도 따스한 가이안 선사의 말에 주지 스님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말씀하신 대로 어릴 때부터 사찰에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불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맹렬히 수행을 하면서도 늘 이것이 나의 길인가 의문이 들었답니다. 그러다 우연찮게 소년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첫눈에 반했고, 늘 옆에 두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은 제 평생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죠. 그러다 소년이 갑자기 병에 걸렸고, 저는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저는 절망과 분노에 빠졌습니다. 왜 이 아이가 죽어야 하는지, 부처님이 정말로 있다면 왜 죽게 내버려 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그다음부터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혔고, 차마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도 저질렀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마친 주지 스님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비록 잘못된 길을 갔다고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친다면 부처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외다."

“소인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따르게.”

주지 스님을 데리고 뒤뜰로 간 가이안 선사는 평평한 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라고 한 다음 머리에 쓰고 있던 푸른 두건을 벗어서 씌워줬다. 

"강월조송풍취 영야청소하소위”

"무슨 뜻입니까?”

주지 스님의 물음에 가이안 선사가 대답했다.

"가을의 맑은 달이 냇가에 비추고 소나무에 부는 바람은 상쾌하도다. 기나긴 밤의 경치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르겠다는 뜻일세. 우리 조동종 증도가의 구절이지. 마음의 번뇌를 벗을 때까지 이곳에서 계속 이 구절을 외우게."

"기꺼이 뜻을 찾겠습니다."

가이안 선사에게 몇 번이고 다짐한 주지 스님은 돌 위에 앉아 증도가의 구절을 중얼거렸다. 그런 주지 스님에게 합장을 한 가이안 선사는 절을 벗어났다.

 


5. 죽어서도 버리지 못한 정념

 

첫눈이 내릴 무렵 마을에 다시 들렀다. 반갑게 맞이한 촌장이 융숭하게 저녁을 대접했다. 

“뒷산의 주지 스님은 그 이후에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촌장이 고개를 저었다.

“말씀하신 대로 절이 있는 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있고요."

“별 일이 없었다니 다행입니다.”

“주지 스님의 모습을 못 본 지 오래돼서 걱정이 됩니다. 지난달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길을 잃은 마을 사람이 사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답니다."

"내일 날이 밝은 대로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촌장의 이야기를 들은 가이안 선사는 다음 날 아침 절이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왕래가 끊긴 산길에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고, 중간중간 끊겨 있었다. 문짝들은 모두 사라졌고, 뜰에 자란 풀은 더 무성해졌다. 안으로 들어간 가이안 선사는 뒤뜰로 갔다. 키만큼 자란 풀 사이로 어스름한 그림자가 보였다.

 

푸른 두건을 쓴 주지 스님이 작년에 앉았던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미 숨을 거둔 지 오래됐는지 퀭한 두 눈에 살은 쭈글쭈글 말라 있는 상태였다.

너무나 안타까워진 가이안 선사가 합장을 하면서 명복을 빌려는 찰나 귓가에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합장을 멈춘 가이안 선사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희미하게 증도가를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하게 그가 가르쳐 준 그 구절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가이안 선사는 분노와 슬픔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지스님은 끝끝내 애욕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해 숨이 끊어지고 육신만 남아서도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번뇌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주지 스님에 대한 안타까움에 코끝이 찡해진 가이안 선사는 지팡이를 번쩍 치켜들고 단숨에 주지 스님의 머리를 내리쳤다. 지팡이에 맞은 육신은 힘없이 바스러져서 뜰에 흩어졌다. 

 

그 찰나에 굴레를 벗어난 듯한 짧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공손하게 합장을 한 가이안 선사는 푸른 두건을 챙겨 마을로 돌아왔다. 일이 끝날 무렵 떠나려는 가이안 선사에게 촌장이 말했다.

"어쩌면 이것도 부처님의 뜻일지 모릅니다. 이 절에서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소서."

그렇게 해서 가이안 선사는 수리한 절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늘 푸른 두건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 번 편은 가볍게 하나로 끝낼 수 있어 좋았습니다.

 

Spide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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