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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캥거루 통신 줄거리- 1편: 중국행 슬로보트 -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by SpiderM 2024.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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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책은 <캥거루 통신> 1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국행 슬로보트>의 7개 단편 중 4번째 이야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 중국행 슬로보트 - 캥거루 통신

 

 

캥거루 통신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노는 날이라, 아침에 근처 동물원으로 캥거루를 보러다녀왔어요. 그리 큰 동물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릴라에서 코끼리까지 웬만한 동물은 대충 다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라마라든가 개미핥기의 팬이라면 이 동물원에는 오지 않는 게좋겠지요. 여기에는 라마도 개미핥기도 없어요. 임팔라도 하이에나도 없습니다. 표범도 없고요.

대신 캥거루가 네 마리 있습니다.

한 마리는 새끼고 겨우 두 달 전에 태어났어요. 그리고 수컷한 마리에 암컷 두 마리. 대체 어떤 식으로 구성된 가족인지 나는 전혀 짐작도 가지 않더군요.

캥거루를 볼 때마다 과연 캥거루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항상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투박한 곳을 저런 묘한 꼴을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걸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부메랑 같은 엉성한 판자조각에 맞아 간단히 죽어버리는 걸까요.

하지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리 큰 문제가아니지요. 적어도 이야기의 본론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아무튼 캥거루를 바라보는 사이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어째서 캥거루를 보고 나한테 편지를 보내고 싶어지는 거지, 캥거루와 나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데, 하고요. 그런데 그런 건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캥거루는 캥거루고 당신은 당신입니다. 캥거루와 당신 사이에 눈길을 끌 만한 명백한 상관관계가 있는 건 아니에요.

말하자면 이런 얘기입니다.

캥거루와 당신 사이에 서른여섯 개의 미묘한 과정이 있고, 그것을 합당한 순서대로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니 당신에게 가닿았다. 그냥 그뿐이에요. 그 과정을 일일이 설명해봤자 아마 당신은잘 모를 테고 우선 나부터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럴만도 하죠. 서른여섯 개나 되잖아요!

그중 하나라도 순서가 어긋났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보내지 않았겠지요. 어쩌면 언뜻 충동이 들어 남극해에서 향유고래의 등에 올라탔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근처 담뱃가게에 불을 질러버렸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서른여섯 개의 우연한 조합이 이끄는 바에 따라,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신기한 일 아닌가요?

그러면 우선 자기소개부터 하지요.

나는 스물여섯 살이고, 백화점 상품관리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건-당신도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만 무지막지하게 따분한 일입니다. 우선 구매과에서 구매를 결정한 상품에 혹시 문제가 없는지 검사합니다. 구매과와 업자 간의 유착을 막기 위한과정이지만 당신이 이 문맥을 통해 상상하는 만큼 진지한 일은아닙니다. 옛날에는 어쨌는지 몰라도 요즘 백화점은 손톱깎이에서 모터보트까지 온갖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고, 그 상품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으므로, 죄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하다가는 하루가 예순네 시간이라도, 우리 손이 여덟 개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회사 측에서도 우리 과에 그런 기능까지 요구하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구두 버클을 슬쩍 당겨보거나 과자를 몇 개 집어먹어보는 정도로 은근슬쩍 넘어갑니다. 이것이 이른바 상품관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보다는 대처요법 즉 고객에게서 접수된 불만의내용을 일일이 점검하는 것이 우리가 맡은 일의 중심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분석하고 원인을 조사해 메이커에 시정을 요구하든가 구매를 중지하든가 합니다. 이를테면 막 구입한 새 스타킹 두 켤레가 연달아 올이 나갔다든가, 태엽장치 곰인형이 테이블에서 한 번 떨어졌다고 작동이 안 된다든가, 목욕가운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더니 사분의 일로 줄었다든가, 하는 유의 불만입니다.

뭐 당신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 불만의 수는 실로 진절머리날 만큼 엄청납니다. 제가 다루는 것은 상품 자체에 대한 불만뿐이지만 그 외에도 백화점에는 엄청나게 많은 불만 사항이 접수됩니다. 제가 속해 있는 과의 사원은 총 네 명인데,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타인의 불만에 쫓기고 있다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말 그대로 불만이 굶주린 짐승처럼 우리 뒤를 쫓아오는 겁니다.불만 중에는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고 정말 말이 안 되는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도있고요.

우리는 그것들을 편의상 A, B, C의 세 가지 랭크로 분류합니다. 사무실 한가운데 A, B, C라는 커다란 상자 세 개를 두고 거기에 불만 편지를 나눠 넣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작업을 '이성理性의 3단계 평가'라고 합니다. 물론 직업상 하는 농담이에요. 신경쓰진 마세요.

아무튼 그 세 가지 랭크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래요.

(A) 합당한 불만,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경우입니다. 선물용과자 세트를 챙겨들고 고객의 집을 방문해 응분의 상품으로 교환해드립니다.

(B) 도의적, 관례적, 법률적으로는 우리에게 책임이 없으나 백화점의 이미지 훼손을 막기 위해, 또한 불필요한 트러블을 피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C)명백히 고객의 책임인 경우이므로, 사정을 설명하고 철회를 요청합니다.

그렇게 며칠 전 당신이 보낸 불만 편지를 신중하게 검토해봤는데, 결국 당신의 불만은 C랭크로 분류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는자아, 잘 들어주세요.

① 한번 구입한 레코드를 ② 그것도 일주일이나 지난 뒤에

③ 영수증도 없이, 교환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서도 안됩니다.

 

 

캥거루 통신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럼, 이것으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당신의 시정 요구는 각하되었습니다.

하지만 직업적 관점을 떠나 말씀드리자면-실은 매번 떠나버립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당신의 불만에 대해 - 브람스의 교향곡과 말러의 교향곡 레코드를 착각하고 잘못 사버렸다는 불만에-대해 진심으로 딱하게 생각합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판에 박힌 사무통지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어찌 보면 친밀감이 담긴 메시지를 당신에게 보내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최근 일주일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관례상 레코드는 교환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내주신 편지에 뭔가 제마음을 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저러해서 저러저러하고…………. 이런 편지를요. 하지만 매번 잘 써지지 않았어요. 나는 결코 글을 쓰는 데 서툰 편이 아닙니다. 스스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오히려 잘 쓰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쓰느라 힘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만 하면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떠오르는 말은 항상 엉뚱한 것뿐이었어요. 글로서는 문제가 없는데 감정이라는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나는 다 써서 봉투에 넣어 우표까지 붙인편지를 몇 통이나 찢어서 버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답장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불완전한 편지를 보내느니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 편이 나으니까요. 그렇잖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완벽하지 않은 메시지 따위 엉터리시간표와 같다고요. 그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캥거루 우리 앞에서, 나는 서른여섯 개의 우연한 조합을 거쳐 한 가지 계시를 얻었습니다. 즉 위대한 불완전함. 이라는 것을요.

위대한 불완전함이 무엇이냐고 당신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군요-당연히 궁금하겠죠. 위대한 불완전함이란,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결과적으로 용납한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캥거루를 용납하고 캥거루가 당신을 용납하고 당신이 나를 용납한다ㅡ 예를 들자면 그런 얘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이클은 물론 항구적이지 않아서, 어느 순간 캥거루가 이제 더는 당신을 용납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캥거루에게 화를 내지는 말아주세요.그건 캥거루 탓도 당신 탓도 아니니까요. 혹은 내 탓도 아닙니다. 캥거루에게도 나름대로 매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거예요. 대체 어느 누가 캥거루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순간을 포착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입니다. 순간을 포착해 기념사진을 찍어두는 것이죠. 앞줄 왼쪽부터 당신, 캥거루, 나, 이런 식으로요.

글을 쓰는 건 이제 포기했습니다. 간단한 사무통지 글이라도 안됩니다. 글자 자체를 더는 신용할 수 없거든요. 이를테면 내가 '우연'이라는 글자를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당신이 이 '우연'이라는 글자를 보고 느끼는 것은 내가 똑같은 글자를 보고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를지도-어쩌면 정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이건 대단히 불공평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나는 팬티까지 벗었는데 당신은 블라우스 단추 세 개밖에 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일 아닙니까? 저는 불공평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계란 불공평한 것이죠. 그러나 적어도 일부러 나서서 적극적으로 그런 것에 가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나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래서 나는 카세트테이프에다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직접 녹음하기로 했습니다.

(휘파람 보기 대령 행진곡> 여덟 소절)

어때요. 들리십니까?

이 편지 - 카세트테이프-를 받아들면 당신이 어떤 기분일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어쩌면 몹시 불쾌할 수도 있겠죠. 왜냐하면 백화점 상품관리 담당자가 고객의 불만 편지에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한 답장을 그것도 개인적인 메시지를 보낸다는 건 누가 봐도 지극히 이례적이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실로 어처구니없다고도 할 수 있기때문이지요. 그리고 만일 당신이 불쾌한 마음에, 혹은 화가 난나머지 이 테이프를 내 상사 앞으로 반송한다면 회사에서의 내입장은 매우 미묘해질 겁니다.

만일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래도 나는 화를 내거나당신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어때요. 우리 입장은 100퍼센트 대등합니다. 즉 나는 당신에게 편지를 보낼 권리가 있고, 당신은 내 생활을 위협할 권리가있어요. 그렇잖아요. 어때요, 공평하죠? 그래요, 나는 나름대로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절대 장난삼아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참, 깜빡한 게 있군요. 나는 이 편지에 '캥거루 통신'이라는이름을 붙였습니다.

무엇에나 이름은 필요하니까요.

예를 들어 당신이 만일 일기를 쓴다면 "오늘 백화점 상품관리담당자에게서 불만 편지의 답장(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것)이왔다"라고 장황하게 쓰는 대신, "오늘 '캥거루 통신'이 왔다"라고만 하면 되겠지요. 어때요, 간단하고 좋죠? 게다가 '캥거루 통신'이라니 꽤나 멋진 이름 아닙니까? 너른 초원 저 너머에서 캥거루가 배 주머니에 우편물을 한가득 담고 깡충깡충 뛰어오는것 같잖아요.

똑.똑.똑. (책상 두드리는 소리)

이건 노크입니다. 노크노크노크………… 아시겠죠? 제가 당신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문을 열고 싶지 않다면 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 어떻게 하든 괜찮아요. 더 듣고 싶지않다면 여기서 테이프를 멈추고 쓰레기통에 던져주십시오. 나는단지 당신 집 현관 앞에 앉아 잠시 혼자서 주절거리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이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실제로 당신이 듣건 듣지 않건 상관없지 않겠어요.하하하. 이것도 사태가 공평하다는 증거입니다. 나한테는 얘기
할 권리가 있고, 당신한테는 듣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좋아요. 아무튼 다시 시작하죠. 노크는 이미 했고, 당신이 거기에 응답할 의무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불완전함이란 것도 상당히 힘듭니다. 원고도 없고 계획도 없이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게 이토록 힘들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마치 사막 한가운데 서서 컵으로 물을 뿌리는 느낌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반응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VU미터 바늘에 대고 말하고 있습니다. VU미터 아시죠? 음량에 맞춰 움찔움찔 바늘이 흔들리는 그거 말이에요. V와 U가 무엇의 머리글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그들은 내 연설에 반응을 보이는 유일한 존재예요.

V와 U는 실로 엄격한 2인조입니다. V 아니면 U, U 아니면 V, 그것뿐이죠. 멋진 세계예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소리를 주절거리건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건 내 목소리가 얼마나 강하게 공기를 진동시키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공기가 진동하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멋있지 않습니까?

그들을 보고 있으면 뭐든 좋으니 아무튼 계속 주절거리는 생각이 들어요. 뭐든 좋아요. 불완전하든 어떻든 그들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공기의 떨림입니다. 의미가 아닙니다. 그냥 공기의 떨림이에요. 그것이 그들의 양식이죠.후유.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무척 딱한 영화를 봤습니다. 아무리 농담을 던져도 누구도 웃어주지 않는 코미디언 이야기예요. 아시겠어요? 누구 하나 웃지 않는다고요.

지금 이렇게 마이크에 대고 주절거리고 있으려니 자꾸 그 영화가 떠오르는군요.

참 신기한 일이죠.

똑같은 대사라도 어떤 사람이 하면 웃겨 죽겠는데 다른 사람이 하면 전혀 웃기지 않아요. 신기하지 않나요?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그 차이라는 건 아무래도 타고나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왜 있잖아요. 세반고리관 끝이 남들보다 약간 더 구부러졌다든가 하는 식으로. 만일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이따금 생각합니다. 나는 항상 웃긴 생각을 해내고 혼자 배를 잡고 웃는데 막상 입 밖에 내어 누군가에게 들려주면 전혀, 조금도재미있지가 않아요. 마치 이집트의 모래 사내가 된 듯한 기분이죠. 게다가 무엇보다……………



캥거루 통신 1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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