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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

무라카미 하루미 <중국행 슬로보트> : 캥거루 통신 줄거리 2편

by SpiderM 2024.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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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중국행 슬로보트>에 실려있는 단편집 중 <캥거루 통신> 2편입니다. 1편을 안 보신 분은 읽고 오셔야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국행 슬로보트> - 캥거루 통신 2편

 

중국행 슬로보트 - 캥거루 통신

 

 

 

이집트의 모래 사내라고, 알아요?

흠, 그러니까, 이집트의 모래 사내는 원래 이집트 왕자로 태어났어요. 아주 오랜 옛날, 피라미드니 스핑크스니 하던 시대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얼굴이 아주 못생겨서 정말로 엄청 못생겼어요-왕에게 미움을 받아 깊은 정글 속에 버려져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 늑대인지 원숭이인지가 키워줘서 살아남아요. 흔한 얘기죠.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모래 사내가 되어버려요. 모래 사내는 말이죠, 손에 닿는 것을 모조리 모래로 바꿔버립니다. 산들바람은 모래먼지가 되고, 시냇물은 모래가 되어 흐르고, 초원은 사막이 돼요. 이게 모래 사내 이야기죠. 들어본 적있어요? 없죠? 실은 내가 멋대로 지어낸 얘기거든요. 하하하.

아무튼 당신을 향해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자니 이집트의 모래사내가 된 것 같아요. 내 손에 닿는 모든 것이 모래, 모래, 모래,모래, 모래, 모래・・・・・・

아무래도 나에 대해 너무 많이 말하는 것 같군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왜냐하면 난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내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주소와 이름, 그뿐입니다. 몇 살인지, 연수입은 얼마인지, 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뚱뚱한지 말랐는지, 결혼은 했는지 어쨌는지, 나는 전혀몰라요.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좋기도 하죠. 나는 가능하면 단순하게, 최대한 단순하게, 이른바 형이상학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으니까요.

즉, 여기 당신의 편지가 있습니다.

나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유쾌하지 않은 예를 들어 죄송하지만, 동물학자가 정글에서채집한 똥을 바탕으로 코끼리의 식생활이며 행동양식이며 몸무게며 성생활을 추정하듯이,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바탕으로 당신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외모라든가 향수 종류 같은 시답잖은 건 빼고, 존재 그 자체를 말이죠.

당신의 편지는 실로 매력적이었어요. 문장, 필체, 쉼표와 마침표, 행갈이, 수사법, 모든 게 완벽해요. 뛰어나다는 게 아닙니다.그저 완벽한 거예요. 고칠 게 없었어요. 매달 오백 통이 넘는 불만 편지와 보고서를 읽지만 솔직히 당신의 편지만큼 감동적인편지는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편지를 몰래 집에 가져와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편지를 철저하게분석했어요. 길이가 짧아서 그리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분석 결과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우선 쉼표가 압도적으로 많았어요. 마침표 하나에 쉼표 6.36개, 많지 않습니까? 아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쉼표를 찍는 방식에 정말이지 아무 원칙도 없어요.

아, 이런 말을 한다고 내가 당신의 글을 비웃는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그저 단순히 감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감동 말이에요.

쉼표와 마침표만이 아닙니다. 당신 편지의 모든 부분이-잉크얼룩 하나에 이르기까지 - 나를 도발하고 뒤흔들어요.

어째서인가?

따져보면 그 글 속에 당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토리는있어요. 한 여자아이가-혹은 성인 여자가-깜빡 착각하고 엉뚱한 레코드를 사버렸다. 수록곡이 좀 다르다고는 느꼈지만 아예 다른 레코드라는 것을 그녀가 깨닫기까지는 정확히 일주일이걸렸다. 매장 여직원은 교환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불만 편지를써 보냈다. 이게 스토리입니다.

나는 그 스토리를 이해하기까지 당신의 편지를 세 번이나 읽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편지는 우리 앞으로 온 다른 어떤 불만 편지와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불만 편지에는 불만 편지만의 말투가 있어요. 고압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비굴하기도하며, 어떤 때는 논리정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톤이 어찌되었든 거기서는 불만을 토로하는 인간의 존재라는 핵을 감지할 수있습니다. 핵이 있고, 그 핵을 축으로 삼아 다양한 종류의 불만이 형성되는 거예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나는 온갖 종류의 불만 편지를 읽어요. 말하자면 불평불만의 권위자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불만은, 내 눈으로 봐서는 불만이라고 할 수조차 없습니다.왜냐하면 불만을 제출한 당신 자신과 당신이 제출한 불만 사이에 연관성이라 할 만한 것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혈관이 달려 있지 않은 심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체인 없는 자전거나 마찬가지예요.

솔직히 나는 고민을 좀 했습니다. 당신 편지의 목적이 과연 불만 시정 요구인지 고백인지 선언인지, 아니면 어떤 종류의 테제확립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편지는 내게 대량학살 현장 사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코멘트도 없고 기사도없고 그냥 사진뿐이에요. 어디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길가에 사체가 나뒹구는 사진이죠.

당신이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그것조차 알 수 없었어요.당신의 편지는 임시방편으로 지은 개미집처럼 복잡하게 엉켜 있고, 그러면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참대단하죠.

탕탕탕탕...... 대량학살입니다.

그래요, 얘기를 좀더 단순화해봅시다. 지극히 단순하게요.즉 당신의 편지는 나를 성적으로 고양시킵니다.네. 성적으로 말이에요.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군요.

똑.똑.똑.

노크입니다.

관심이 없으면 테이프를 멈추세요. 십 초간 침묵하겠습니다.그뒤 나는 VU미터에 대고 혼자 주절거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듣고 싶지 않다면 그 십초 사이에 카세트를 끄고 테이프를버리든지 백화점으로 반송하든지 하세요. 자, 지금부터 침묵합니다.

(십 초간 침묵)

시작하겠습니다.

앞다리는 짧고 발가락이 다섯 개인 반면 뒷다리는 현저하게길고 크며 발가락이 넷이고, 넷째 발가락만 강대하게 발달했으며 둘째 셋째 발가락은 아주 작고 서로 붙어 있다.

・・・・・・ 이건 캥거루의 다리에 대한 묘사예요. 하하하.

그러면 정사에 대해.

나는 당신의 편지를 집에 가져온 뒤로 내내 당신과 자는 생각만 합니다. 침대에 들면 옆에 당신이 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역시 옆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당신은 일어나 있고 원피스 지퍼를 올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나는 그거 아나요? 상품관리과 인간으로서 한마디하자면, 원피스 지퍼만큼 잘 망가지는 것도 없어요-눈을 감은 채 가만히자는 척합니다. 당신을 볼 수는 없거든요. 그러면 당신은 방을가로질러 세면실로 사라집니다. 그제야 나는 눈을 뜹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는 회사에 갑니다.

밤에는 어두워서 아주 깜깜해지도록 창문에 특별한 블라인드를 달았습니다 당연히 당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도 몸무게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몸에 손을 댈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뭐, 괜찮아요.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당신과 정사를 하건 안하건 어느 쪽이든 괜찮아요.

・・・・・・ 아니, 그건 아닌데.

잠깐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오케이, 이런 얘기입니다. 나는 당신과 자고 싶다. 하지만 자지 않아도 괜찮다. 즉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가능한 한 공평한입장에 서고 싶어요. 내가 남에게 뭔가를 강요하거나 남이 내게뭔가를 강요하는 건 싫어요. 당신의 존재를 곁에서 느낀다든가당신의 쉼표와 마침표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뛰어다닌다든가,그것만으로 이미 나는 충분합니다.

이해가 되셨는지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때때로, 개에 대해 개체의 '개'를 말하는 겁니다 생-각하는 게 무척 힘듭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몸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기분이에요.

…………… 이를테면 전철을 탄다고 합시다. 전철 안에는 몇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타고 있어요. 원칙적으로 생각하면 이건 그냥'승객'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따금 그런 승객 한 사람 한사람의 존재가 몹시 신경쓰일 때가 있어요. 이 사람은 대체 뭘까, 저 사람은 대체 뭘까, 왜 긴자선 전철을 타고 있을까, 하고요. 그러면 끝장이죠. 일단 신경쓰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요. 저 샐러리맨은 곧 이마 양옆부터 벗어지겠구나, 저 여자애는 종아리 털이 좀 지나치게 많구나, 일주일에 한 번은 밀어주려나, 맞은편에 앉은 젊은 남자는 어쩌자고 저렇게도 색깔이 맞지 않는 넥타이를 매고 있을까, 뭐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몸이 덜덜 떨려서 전철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져요. 지난번에도-당신은 분명 웃겠지만-하마터면 문 옆의 비상정지 버튼을 눌러버릴 뻔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나를 예민한 인간이라든가신경질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나는 예민한 편도 아니고 신경질적이지도 않습니다. 극히 보통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샐러리맨입니다. 백화점 상품관리과에 근무하며 고객의 불만을 처리합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 이외의 인간이 되어본 적이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런 점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정상적인 편이 아닐까 합니다. 애인 비슷한 여자도 한 명 있어서 일 년 전쯤부터 일주일에 두 번은 잠자리를 하고, 그녀도나도 그런 관계에 꽤 만족하고 있죠. 다만 나는 그녀에 대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결혼할 마음도 없습니다. 만일 결혼을 해버리면 분명 나는 그녀라는 인간의 세부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될 테고, 그런 뒤에도 관계를 잘 이어나갈 자신이 전혀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함께 사는 여자의 치열이나 손톱 모양에 일일이 신경써가면서 어떻게 버틸 수 있겠습니까.

조금만 더 나에 대해 얘기하고 싶군요.이번에는 노크 없이 갑니다.여기까지 들었다면 내친김에 마지막까지 들어주세요.잠깐만요. 담배 좀 피우겠습니다.

(부스럭 부스럭)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많은 것을,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한 적이 없어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도 그럴 게 굳이 남에게 얘기할 만한 것도 못 되고, 만일 얘기한다 해도 아마관심 갖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왜 당신을 향해 이런 얘기를 하는가?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지금 위대한 불완전함을 지향하고 있기때문이에요.

그 위대한 불완전함을 촉발한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편지와 캥거루 네 마리예요.

캥거루.

캥거루는 무척 매력적인 동물이라 몇 시간을 바라봐도 싫증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캥거루는 당신의 편지와 무척 닮았습니다. 캥거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은 의미도 없이 하루종일 울타리 안을 뛰어다니고 이따금 땅바닥에 구멍을 파요. 구멍을 파서 뭘 하는가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구멍을 팔 뿐이죠. 하하하.

캥거루는 한 번에 한 마리밖에 새끼를 낳지 않습니다. 그래서암컷 캥거루는 새끼 한 마리를 낳으면 금세 또 임신하죠. 그러지 않으면 캥거루의 개체수를 유지할 수 없어요. 즉 암컷 캥거루는 일생의 대부분을 임신과 육아에 쓰는 겁니다. 임신 아니면 육아, 육아 아니면 임신. 그러니 캥거루는 캥거루를 존속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캥거루라는 존재 없이 캥거루는 존속하지 못하고, 캥거루의 존속이라는 목적이 없으면 캥거루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이상한 일이죠.

얘기가 오락가락해서 미안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하지요.

사실 나는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 몹시 불만이에요. 외모라든가 재능이라든가 지위라든가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내가 나 자신인 것이요. 매우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불평불만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말아주세요. 나는 직장이나 월수입 등에 대해 한 번도 불만을 토로해본 적이 없어요. 하는 일은 분명 따분하지만 일이란게 원래대부분 따분한 법이죠. 돈 따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고요.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나는 동시에 두 군데의 장소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에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라는 개체성이 그런 내 희망을 방해하고 있어요. 몹시 불쾌한 사실 아닙니까? 불합리한 압박 같지 않습니까? 나의 이런 희망은 굳이 따지자면 소박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천재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늘을 날겠다는 것도 아니죠. 동시에 두군데의 장소에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뿐입니다. 아시겠어요? 세군데도 네 군데도 아니고 단 두 군데입니다. 나는 콘서트홀에서오케스트라를 들으면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겁니다. 백화점 상품관리 담당자이면서 맥도날드의 쿼터파운드 햄버거이고도 싶고요. 나는 애인과 자면서 당신과도 자고 싶습니다. 나는개체이면서 원칙이고도 싶습니다.

담배 한 대 더 피우겠습니다.

후유.

솔직히 좀 피곤하군요.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ㅡ나 자신에 대해 솔직히 얘기하는 게 -통 익숙지 않아서요.

한 가지 확실히 해두겠는데요. 나는 당신이라는 여자에게 성적인 욕망을 품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내가나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에 몹시 화가 나는 거예요.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는 것. 이건 지독히 불쾌한 사실입니다. 나는 홀수를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개인인 당신과 자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만일 당신이 둘로 나눠지고, 나도 둘로 나눠지고, 그래서 그네 명이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주 솔직하게 많은 얘기를 나눌 수있을 텐데 말이에요.

부디 답장은 하지 마세요. 내게 편지하고 싶다면 회사로 불만편지를 보내주세요. 만일 불만이 없다면 뭔가 생각해주세요.그럼.

(스위치 소리)

여기까지 녹음한 내용을 방금 되감기해서 들어봤습니다. 솔직히 말해, 몹시 만족스럽지 못해요. 깜빡 착각하고 강치를 죽게 만든 수족관 사육사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이 테이프를 당신에게 보낼지 말지 나도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보내기로 결정한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쨌든 나는 불완전함을 지향했어요. 아니, 완전해야할 필요성을 방기한 것이죠. 내가 이런 마음을 먹는 일은 앞으로두 번 다시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흔쾌히 거기에따르죠. 그 불완전함을 당신과 캥거루 네 마리와 함께 나누기로하죠.

그럼.

(스위치 소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국행 슬로보트>에 실려있는 단편집 중 <캥거루 통신> 2편이자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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