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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담

혼선 _ 미야베 미유키 _불문율_단편추리소설_미스터리_일본문학

by SpiderM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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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 추리 소설 <불문율>에 실린 글 중 <혼선>에 대한 글입니다.

 

 

 

 

전화벨 소리에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두 시 반, 동생 말대로 어김없이 정각이었다.

 

벨은 계속 울렸다. 착신을 가리키는 빨간 등이 조급하게 깜빡였다. 나는 동생을 채근해서 수화기를 들게 했다.

 

"네."

 

상대가 누구인지 알 때까지 그 말밖에 하지 않는다. 목소리도 조심스럽다. 경계하는 것이다.

 

동생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미간에 주름을 꽉 잡더니 나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작고 빠르게 끄덕였다. 역시 녀석이다.

 

나는 일어나서 전화로 다가갔다. 송화기를 손바닥으로 감싼 동생은 빠르게 떠들었다.

 

“평소처럼 소름 끼쳐. 정말 짜증 나는 놈이야."

 

나는 수화기를 받아 들며 등을 펴고 말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아, 끊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이 밤마다 전화 거는 번호를 쓰는 여자애의 오빠예요. 끊지 마세요, 끊지 마요. 당신은 동생에게 늘 얘기를 조금 나누고 싶을 뿐이라고 한다면서요? 얘기하는 것쯤 뭐 어떠냐, 상대해 줘도 되지 않느냐고요. 그러면 오늘 밤은 제가 상대해 드리죠."

 

찰칵하는 소리가 들리며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수화기를 손에 든 채 동생의 얼굴을 보았다. 동생은 검은 콘택트렌즈를 빼내려던 참이었다. 커다란 눈에 손가락을 살짝 댄 채 귀엽게 메롱을 한다.

 

"끊겼어."

 

"걱정하지 마. 조금 기다리면 또 걸어올걸. 늘 그래."

 

"너 혼자라면 그렇겠지만 남자 목소리가 들렸으니 경계하지 않을까? 오늘 밤은 포기할지도 몰라."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동생은 느긋하게 힘을 빼고 좋아하는 의자에 앉았다. 세 가닥으로 땋아서 내린 긴 머리를 풀고 머리를 한번 흔들어 어깨 위로 늘어뜨린다. 언제 봐도 정말 예쁜 머리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반 상식은 통하지 않아. 그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걸. 한번 봐. 또 걸어서 왜 오빠한테 전화를 바꿨느냐고 화낼 테니까. 내기해도 좋아.”

 

만약 내기에 응했다면 동생에게 무언가 사 줘야 할 뻔했다. 정확히 삼십 분이 지나고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오빠도 돌아가고 또 나 혼자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동생은 수화기를 들고 다시 “네” 하고 짧게 말하더니 얼굴을 찌푸린 채 재빨리 팔을 뻗어 수화기를 멀리했다. 꼭 수화기가 침을 뱉은 것처럼.

 

"봐, 화내잖아."

 

나는 내민 수화기를 귀에 대고 상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야, 이 나쁜 년아! 왜 내 전화를 오빠한테 바꿔! 그리고 내 전화를 중간에 끊지 말라고. 너한테는 그럴 권리 따위 없으니까. 내가 너랑 얘기하고 싶다면 너는 상대해야 해. 알겠어?"

 

취하지는 않은 것 같다.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엄청난 기세로 지껄였으니 정말로 침이 튀었으리라. 더러운 남자다. 비참한 남자다.

 

"당신은 나랑 얘기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수다 떨 친구가 아주 많아.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랑 얘기할 여유는 없어. 이렇게 늦은 밤에는 늘 자는 걸. 평범한 사람은 다들 그래.”

 

 

 

 

동생이 침착한 말투로 그렇게 대답하자 상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잡아먹을 듯이 고함쳤다.

 

"나는 너랑 얘기하고 싶어. 그러니까 너한테는 상대할 의무가 있어, 끊어도 몇 번이고 걸어 줄 테다.”

 

"나는 싫어. 당신과 얘기하고 싶다는 사람을 소개해 줄게. 그러니까 끊지 마."

 

동생은 그렇게 선언하고 다시 내게 수화기를 건넸다. 나는 무심결에 한숨을 한 번, 그러고서 수화기를 받아 들고 귀에 댔다.

 

근래 보름가량 심야 두시 반이 되면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그는 세상에 잔뜩 잠재한 음침한 변태 중 한 명이었다.

 

동생은 처음에 장난 전화임을 깨닫고 바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설명서에 적힌 대로 그러자 상대는 몇 번이나 다시 걸었다. 그것 또한 설명서에서 이야기하는 그대로의 반응이기는 했다.

 

동생은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로 했다. 상대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봐요, 왜 이런 시각에 전화해요? 나는 졸리다고요."

 

상대는 히죽히죽 목 안에 웃음을 숨긴 듯한 목소리로 "잤어? 팬티는 입지 않았겠지? 란제리는 입었어?" 같은 말을 지껄였다고 한다.

 

이걸로 확정이다.

 

동생은 다시 설명서대로 행동했다. 이 회선의 관할서로 연락해 자신의 이름과 등록번호를 대고 상황을 설명했다.

 

 

 

동생의 연락을 받은 쪽에서는 즉시 입건해 파일을 만들어 준다. 추적 센터가 회선을 모니터하기 시작한다. 센터의 멤버는 모두 우수해서 한 번만 모니터 하면 장난 전화를 거는 상대의 번호를 밝혀내 버린다.

 

그때부터는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렸다. 동생은 그저 상대를 내버려두고, 요컨대 이쪽에서 일부러 도발하는 듯한 말은 삼가고, 그래도 여전히 끈질기게 거는지 마는지 가만히 관찰한다. 전화가 계속된다면 관할서 경과를 보고한다. 그러면 결재가 떨어진다.

 

회선 모니터로 확인한 전화 주인에 대해 전과까지 다 조회되니까 잘못된 결재를 내릴 일은 없다. 늘 아주 정확하다.

 

마지막은 내가 있는 그룹의 차례다. 솔직히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원만하게 추진하기 위해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가능한 한 호감을 느낄 만한 목소리를 내도록 노력하면서 상대에게 말을 붙인다.

 

안녕하세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얘의 오빠예요. 끊지 말아 주세요. 정말로 당신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묻고 싶은 것도 있고요.

 

당신에게 전화가 걸려 와 곤란하다는 얘기는 동생에게 들었습니다. 동생 말로는 당신이 듣기에 아주 민망한 말을 한다더군요. 그리고 무선 전화기를 쓰는 것 같다고요. 전화기를 든 채 화장실에 가서 당신이 볼일 보는 소리를 일부러 동생에게 들려주거나 한다면서요?

 

여보세요? 조용히 있지 말고 무슨 말이든 해 주세요. 그거 진짜인가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꽤 특이한 사람 같네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끊지 마세요. 끊어도 이쪽에서 다시 걸 테니까. 네? 그런 걸할 수 있을 리 없다고요? 아니, 할 수 있어요. 역탐지는 당신 생각만큼 어렵지 않거든요. 물론 경찰이나 전화국에 부탁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답니다. 시험 삼아 끊어 보실래요? 아니면 제가 당신 전화번호를 말해 볼까요? 369에 XXXX죠?

 

조용한 걸 보니 맞나 보네요. 깜짝 놀라셨어요?

 

자, 이제 얘기가 수월해지겠네요. 잘 들으세요.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얘기니까.

 

아, 맞다. 그러기 전에 한 가지만 확인할게요. 당신이 동생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너한테는 내 얘기를 들을 의무가 있다'고 했다던데 사실인가요? 동생이랑 아는 사이예요? 아니라고요? 그럼 전혀 모르는 사이네요. 당신이 동생에 대해 아는 건 전화번호뿐이군요.

 

우연히 발견한 번호죠?

 

그러면 이것도 이상하네요. 이상하죠? 생판 모르는 사람이 멋대로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걸어서는 '얘기 상대가 되어 달라'는 것만으로도 뻔뻔한데 '너한테는 내 얘기를 들을 의무가 있다니, 자신이 왕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이 세상 모든 여자를 자신의 하렘에 가둬 둔 첩으로라도 생각하는 건가요. 다른 것보다 한밤중이에요. 다른 사람을 두들겨 깨워도 된다니 당신은 진짜로 끊으셨네요? 보세요, 여기서 문제없이 다시 걸 수 있죠? 끊어도 소용없다고 했잖습니까. 이 얘기는 들어 두는 편이 좋아요. 당신을위해서. 그러니까 앞으로 더 이상 끊지 마세요.

 

본론은 이제부터에요. 이건 제 친구의 친구가 경험한, 그러니까 실화인데요. 이름은 밝히기 그렇지만 진짜 있었던 일이에요.

 

제 친구 이름은 일단 유지라고 해 둘까요. 그쪽이 얘기하기 편하니까요.

 

유지는 대학생이었어요. 학교 이름과 과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뭐, 비교적 성실하게 공부한 편이에요. 앞으로 얘기할 사건 뒤에 제대로 졸업해서 취직했으니까요.

 

유지는 대학이 집에서 멀어 하숙을 했어요. 친구네 집에 신세를 졌지요. 친구 이름은, 그래요, 다케시라고 해 둘까요?

 

다케시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홀로 멀리 떨어진 도시에 계셨어요. 그래서 방이 비었죠. 유지가 신세를 져도 곤란할 게 없었어요.

 

그런데 하숙을 시작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 유지에게는 곤란한 일이 한 가지 생겼어요.

 

다케시에게 밤마다 장난 전화를 걸며 즐기는 나쁜 버릇이 있음을 눈치챈 거죠.

 

함께 사는데다 유지는 올빼미형이라서 금세 알아챘어요. 처음에는 여자 친구에게 거는 줄 알았는데 문득 떠올려 보니 다케시에게는 여자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어요. 다케시나 유지나 겉모습은 고만고만한데 어째서인지 다케시에게는 친구가 적었죠. 그래요, 남자 친구도요. 유지 외에는 이렇다 할 사람이 없었어요.

 

유지 역시 다케시와는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편의점에서 알게 된 사이일 뿐이지 그렇게 친한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하숙도 너무 열심히 권해서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승낙한 거나 다름없었어요. 다케시와는 취미도 비슷하지 않았고 놀러 가는 장소도 달랐지요. 애초에 다케시에게는 이렇다 할 취미가 없었거든요. 한밤중에 야한 전화 걸기 외에는.

 

 

 

 

곤란한 녀석이죠, 다케시란 남자는.

 

유지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밤마다 추잡한 전화를 거는 다케시에게 두세 번 충고해 본 적도 있었어요. 그런 바보같은 짓은 그만두라고. 다케시는 들어주지 않았죠. 능글맞게 웃으면서 전화니까, 어차피 들키지 않으니까 뭘 하든 괜찮아,라고만 했죠.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어요. 이런 건 뜻밖에 쉽게 들키는 법이라서요. 다케시가 어떤 계기로 이런 장난을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대가는 확실히 다케시의 등 위에 쌓였습니다.

 

물론 장난 전화를 받은 사람이 앙갚음하러 온 건 아니에요.

 

그러나 밤만 되면 그런 반사회적인 짓을 한다는 게 다케시의 얼굴에 온몸에서 절로 풍기는 분위기에 숨김없이 드러났죠. 여자애들은기분 나빠서 다케시에게 다가가지 않아요. 치한을 보는 듯한 눈으로 볼뿐이죠. 그녀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겠죠.

 

다케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다시 야한 전화를 겁니다. 이런 걸 악순환이라고 하죠.

 

어쨌든 즐거워야 할 대학 생활이 이어지는 이면에서 다케시의 장난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끝내는 전화를 받은 본 적도 없는 여자애에게 "내일 오후 여섯시 신주쿠 역 동쪽 출구로 백만 엔을 가지고 와. 경찰에 떠들면 얼굴에 황산을 뿌려 버리겠어" 같은 말로 위협하며 즐기기에 이르렀죠.

 

유지는 생각다 못해 다케시의 어머니에게 한번 상담해 보기로했어요.

 

다케시의 어머니는 화만 냈지요. 그런 끔찍한 얘기를 하면 유지를 집에서 쫓아내겠다는 기세였죠.

 

"너야말로 그런 짓 하는 거 아니니? 그걸 다케시 탓으로 하려고? 우리 다케시가 그런 추잡한 애일 리가 없잖아."

 

다케시의 어머니 편을 조금 들자면 가정용 내선 전화를 이용하는 다케시네 집에서는 각자의 방에 전화가 설치되어 있어서 문을 닫아 버리면 다케시가 누구에게 어떤 전화를 걸어도 바깥에서 알 길이 없다는 걸 밝혀 두죠. 그러나 어머니가 그렇게 둔한 존재일까요? 유지는 다케시의 어머니가 애초에 자식을 교육하려는 마음조차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답니다.

 

실패로 끝난 상담 때문에 유지는 그날 중으로 나가 달라는 말을 듣고 말았습니다. 소중한, 단 한 명의 친구를 잃으면 큰일이라며 다케시가 열심히 중재해 주었지만 다케시의 나쁜 버릇과 그것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는 태도에 유지는 다소 진저리가 나 있던 터라 하숙을 나가기로 했습니다. 대학 가까이에 싼 집을 구해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는 속이 후련해서 왜 좀 더 빨리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 후회했을 정도였죠.

 

 

 

그런데 '도망치면 쫓아온다'라는 비유는 남녀 사이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지, 다케시는 끈질기게 유지를 따라다녔답니다. 다시 함께 집에서 살자든가 엄마는 잔소리가 심하니까 다른 집을 빌려서 같이 살자든가 하며 지치지 않고 말을 붙였죠.

 

유지는 늘 쌀쌀맞게 거절했어요. 유지에게는 달리 많은 친구가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친구도 생겨서 다케시를 상대할 여유가 없었거든요. 언제나 즐거워 보이는 유지를 다케시는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배신당해 버림받은 여자가 자신을 내친 남자의 결혼식을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눈초리로요.

 

그로부터 보름쯤 지나 여자 친구가 유지에게 “요즘 기분 나쁜 전화가 걸려와서 죽겠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놀란 유지가 자세히 들어 보니 말하는 내용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다케시가 범인 같았어요.

 

유지의 여자 친구는 가족과 함께 살았죠. 그러니까 비교적 경계하지 않고 자택 전화번호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거나 명부에 싣거나 했어요. 다케시는 그걸 찾아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겠죠. 끝내는 "유지와 헤어지지 않으면 면도칼로 얼굴을 그어 주겠어"라는 말까지 꺼냈다더군요.

 

이것 때문에 유지도 진심으로 화가 났죠. 어느 날 결국 유지의 눈을 피해 살금살금 행동하는 다케시를 붙잡았어요.

 

따지고 캐물어도 다케시는 실실 웃기만 했습니다.

 

"나라는 증거라도 있어?"라든가 "네 여자 친구 같은 못난이를 누가 상대하겠냐?"라든가 하며 시치미를 뗐어요.

 

정말이지 손쓸 길이 없는 남자죠.

 

유지도 결국 이런 녀석과 진지하게 얘기해 보았자 소용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묘한 광경을 보았죠.

 

 

둘은 대학 근처 카페 안에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유리 벽으로 된 밝은 가게예요. 둘의 자리는 창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요.

 

구름 한 점 없는 유리 너머로 차가 오가는 도로와 지나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빨강과 흰 줄무늬의 커다란 차양 덮개도 내려져 있었어요. 도시의 어디에든 있는 풍경이에요.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킬 만큼 예쁜 얼굴의 아이 하나가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어서 이쪽을 바라보았다더군요.

 

예? 뭡니까? 아, 웃고 계신 거군요. 좋아요, 사양 말고 웃으세요. 이야기의 뒷부분을 들으면 그렇게 웃지 못할 테니까요.

 

음. 어디까지 얘기했죠?  맞다. 무척 귀여운 얼굴을 한 아이가 유지와 다케시를 가만히 지켜보았어요. 유지는 그것을 알아챘지만 다케시는 눈치채지 못했죠. 창문을 등지고 있었거든요.

 

유지도 가만히 그 애를 응시했죠. 그래서 알았어요. 그 애는 유지가 아니라 다케시를 바라보았어요.

 

고작 열 살이나 됐을 아이예요. 유지랑 나란히 서면 그의 팔꿈치에도 닿지 않을 겁니다. 호리호리하고 작은 몸에 넋이 나갈 정도로 반듯한 얼굴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자애 같지만 머리칼을 짧고 가지런히 잘랐고 앞머리는 눈썹을 가릴 정도의 길이였어요. 인형 같은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검은 옷을 입은 아이였어요.

 

유지는 창을 가리키며 다케시에게 물었습니다.

 

“야. 아는 애야?"

 

다케시는 돌아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되물었지요.

 

"누구?"

 

그래요. 다케시가 돌아볼 때까지 불과 몇 초 사이에 그 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유지가 바라보기 전에 전원을 내려 화면을 끈 것처럼 휙 사라져 버렸어요.

 

 

 

유지도 그때는 잘못 보았나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고 깊이 생각할 만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대화는 어긋난 채 끝났지만 유지의 기세에 압도되었는지 여자친구에게 걸려 오던 이상한 전화는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도 지나지 않아 그때와 똑 닮은 얼굴의 여자애를 거듭 보았어요.

 

이번에는 한창 수업 중이었습니다. 계단강의실이었는데 유지는 맨 위에, 다케시는 중간 정도에 앉아 있었죠.

 

여자애는 또 창문 너머로 강의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번에도 다케시를 주시했죠. 다케시는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칠판만 보고 있었어요.

 

유지는 교수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스쳐 가는 걸 느끼면서 여자애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습니다. 여자애는 꿈쩍도 하지 않고 창틀에 작은 손을 댄 채 동물원의 코끼리나 기린을 관찰할 때처럼 열의를 담아 다케시를 보았죠.

 

강의실은 삼층에 있었어요. 창문에는 베란다 따위 없었고요.

 

유지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옆구리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어요. 그럴 만한 계절은 아직 멀었는데 말이죠.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을 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유지는 숨을 삼키고 눈을 부릅떴어요.

 

벌써 눈치채셨죠? 맞아요. 종과 동시에 또다시 여자애는 사라져 버렸답니다.

 

이후로 여자애는 유지의 마음에 크게 뿌리내리고 말았습니다. 유지는 '내가 유령을 보았나' 하고 생각했어요. 유령이라고 한다면 아이가 다케시를 보았던 게 신경 쓰였죠. 다케시가 어린 여자아이의 마음이나 몸에 해를 끼칠 만한 짓을 한 걸까요?

 

유지의 결론은 '녀석이라면 할 만하다'였어요.

 

피해를 입은 여자아이가 원한을 품고서 유령이 되어 나타났을까요?

 

유지는 다케시를 지켜보았습니다. 여자애가 또 나타나지 않을까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케시의 행동 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조사하기 위해서.

 

만약 다케시가 어린 여자애에게 장난을 치거나 끝내 죽여 버릴 만한 짓을 했다면.. 그런 생각을 하자 유지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았죠. 만약 그런 짓을 했다면 절대로 말려야 했습니다. 경찰에 알리기에는 증거가 없었고 스스로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여전히 다케시는 청소하지 않은 화장실처럼 불쾌한 인간이었죠. 장난 전화 걸기도 그만두지 않았어요. 그러기는커녕 이거다 싶은 여자 한 명을 찍어 놓고 철저히 괴롭히며 기뻐하는 꼴이었습니다. 상대가 결국 손들고 전화번호를 바꿔 버리면 어떻게든 해서 바꾼 번호도 알아내겠다며 눈에 핏발을 세웠어요.

 

다케시의 어머니 역시 변함없이 무엇 하나 눈치채지 못했답니다. 정말 태평하죠.

 

유지의 생각대로 여자애는 그 후로도 자주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분명히 다케시를 바라보았어요. 아니,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지는 대학에서, 전차 안에서, 게임 센터에서, 다케시의 집에서 몇 번이나 여자애를 보았습니다. 크고 새카만 눈동자와 무표정한 얼굴. 한결같이 그곳에야말로 노리는 게 있다는 얼굴로 다케시를 관찰했어요.

 

기묘하게도 당사자인 다케시는 여자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확신이 선 건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죠. 어머니가 남편이 일하는 지방으로 가는 바람에 다케시는 집에 혼자 있게 되었어요. 그러자 유지에게 놀러 오라고 치근거렸습니다.

 

유지는 용기를 내서 갔어요. 틈을 봐서 다케시의 방을 뒤질 정말 좋은 기회니까요.

 

하지만 유지는 좀체 혼자 있을 기회가 없었어요. 다케시의 지루한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귀를 기울이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있었죠.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어요. 다케시가 샤워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층에 있는 다케시의 방에 혼자 남겨진 유지는 발소리와 숨을 죽이고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녔어요. 결국 그리 보람은 없었지만요. 다케시는 일기도 쓰지 않았고, 벽장 속에서 누드 사진집과 성인 비디오가 산처럼 나온 것 외에는 수상한 유류품이나 어린 여자애를 어떻게 했다는 냄새가 풍길 만한 물건은 무엇 하나 찾지 못했어요.

 

이래저래 하는 동안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 계단 아래에서 다케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맥주를 마시자고 하더래요.

 

유지는 미련이 남았지만 하는 수 없이 계단 아래로 내려갔죠. 다케시는 선 채로 차가운 캔을 손에 들고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유지도 맥주 캔을 따고 부엌 의자에 앉았어요.

 

"아아, 덥다."

 

다케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복도를 어슬렁어슬렁 걸었어요. 그러고서 "여기는 바람이 잘 들어서 기분 좋아"라며 계단 맨 아랫단에 앉았죠.

 

유지는 이렇게 된 이상 다소 위험한 다리를 건너더라도 직접 다케시를 떠봐서 무언가 알아내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태평한 얼굴을 가장하고 다케시에게 다가갔어요.

 

벌써 저물녘이 지나 밤이 시작됐습니다. 부엌에는 등을 켰지만 다른 방은 캄캄했죠. 다케시 곁에 서서 간격을 두기 위해서 무심코 계단을 올려다본 유지는 이층으로 이어지는 어스름 속에서 어떤 걸 발견했어요.

 

 

 

 

무릎이었습니다.

 

계단 맨 윗단에 누군가 앉아 있었어요. 하얀 두 무릎이 가지런히 있었어요. 다만 이층 방과 복도도 등이 꺼져 있어서 무릎 위는 어스름에 뒤섞여 보이지 않았죠.

 

'아, 또 그 여자애다.'

 

순간적으로 유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무릎이 아주 작았거든요.

 

드디어 집 안까지 들어온 거야.

 

유지가 위를 올려다본 채 우뚝 서 있자 다케시가 말을 걸었습니다.

 

“그런 얼굴로 뭘 보냐?"

 

“저기에 누가 앉아 있어."

 

“뭐?”

 

“봐.”

 

다케시는 그 말에 따라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지요. 이윽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하고 말했습니다.

 

유지의 눈에는 꼼짝 않는 무릎이 보였어요. 유지는 눈을 몇 번 깜빡이 고서 다케시에게 물었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보여?"

 

"전혀."

 

유지는 순간 어금니를 꽉 깨물고 각오를 다지고서 계단 등의 전원을 켰습니다. 힘이 넘쳐서 거의 마시지 않은 캔맥주 내용물이 엄지손가락에 차팍 하고 튀었을 정도였어요.


 

계단 위에는 아무도 없었죠.

 

다만 빛이 켜지기 직전 눈 깜짝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형태가 있는 무언가가 계단에서 쓱 일어나 안쪽 방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본 것 같았어요. 펄럭이듯 움직이는 생선의 배처럼 하얀 무언가를 본것 같았습니다.

 

유지는 이것저것 생각하기보다 먼저 계단을 올라갔어요. 쿵쾅거리며 층계참까지 오르자마자 다케시의 방으로 뛰어들었죠.

 

불을 켜고 활짝 열어 두었던 문 입구에 가로막고 서자 다케시의 방 벽에 설치된 전화기의 착신을 알리는 둥근 녹색 불빛이 번쩍 하고 깜빡였습니다. 그러더니 수화기가 혼자 떨어졌어요. 꼭 무언가가 수화기 속으로 뛰어들어 도망치는 바람에 떨어져 버린 것처럼 보였죠.

 

유지는 천천히 바닥에서 수화기를 주워 들었습니다. 귀를 대자 발신음이 들렸어요. 이미 녹색 전등은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너,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다케시는 그렇게 말하고 소름 끼치게 웃었다고 합니다. 유지는 '이 녀석, 장난 전화를 걸 때 상대 여자애에게 지금 같은 목소리로 웃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어쨌든 유지의 눈에 보이는 신비한 여자애가 다케시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졌죠.

 

그날 밤 묵고 가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유지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거든요.

 

다케시는 역에서 가까운 비디오 가게에 가는 김에 중간까지 바래다주겠다며 함께 밖으로 나왔죠. 둘이 나란히 서서 걸으며 모퉁이 하나를 꺾어 다케시의 집이 보이지 않게 되기 직전, 유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어깨너머로 돌아보았습니다.

 

불이 꺼진 이층의 다케시 방 창문에 흐릿한 그림자 같은 게 보였어요. 사람의 상반신 윤곽을 한 그림자였는데 아주 작았죠.

 

그림자는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두 손바닥과 다섯 손가락의 형태를 분명히 더듬을 수 있을 정도로 힘껏 창문에 들러붙어 있었어요. 그곳만 하얗게 보였죠.

 

유지는 꼭 빨판 같다고 생각했다더군요.

 

 

 

 

여보세요? 아, 다행이다. 듣고 계셨군요. 이야기가 길어서 지치셨나요? 얘기하는 저도 좀 지치네요. 하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유지는 사건이 있고 나서 통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었답니다. 여자애는 유령일까요? 그렇다면 왜 전화기로 드나들까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여자애는 전화기의 정령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화기 속으로 사라진 것도 설명됩니다. 그 애는 전화의 정령인데 다케시가 전화를 너무 더러운 목적으로 쓰는 바람에 화가 나서 나온 게 아닐까..... 하고요.

 

어라, 웃으셨나요? 이건 그렇게 엉뚱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1876년에 유선 전화가 발명되었습니다. 미디어로서는 무척 젊죠. 어리다고 해도 될 정도예요. 그러니까 전화의 정령은 어린애 모습을 하고 나타난 거예요.

 


 

이거 이거 너무 웃으시네요. 뭐, 상관없어요. 계속해도 될까요? 유지는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먼저 다케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야, 너 요즘에도 밤중에 장난 전화 걸어?"

 

다케시는 웃었습니다.

 

"그런 얘기 큰 소리로 하지 마.”

 

“아직 하는 거야?"

 

"하지. 뭐 어떠냐. 전화 요금 꼬박꼬박 내고 전화받는 쪽도 꽤 즐기는데."

 

유지는 다케시의 주장에 찬성할 마음은 없었지만 입을 다물었어요.

 

자신이 너무 허황된 사고에 빠졌는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죠. 딱 한 번 절대로 비밀을 지킨다는 약속을 받고서 여자 친구에게 모든 걸 털어놓아 보았습니다.

 

 

 

처음에 여자 친구는 웃었어요. 하지만 진지한 표정을 지을 뿐 함께 웃으려 하지 않는 유지를 보고 귀여운 얼굴을 불안한 듯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피곤한 거야. 그딴 녀석이랑은 그만 어울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여자 친구는 하얗고 매끈한 손을 들어 유지의 이마를 만졌습니다.

 

"어쩐지 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넌 내가 환각을 보았다고 생각해?"

 

“그게 아니라. 여자애는 정말로 있겠지. 누군가의 동생이라든가 사촌인지도 몰라. 그뿐이야. 전화의 정령이라니, 꼭 애들 동화 같은 얘기잖아? 자기가 너무 깊이 생각한 거야."

 

유지도 '그런가' 하고 마음이 흔들렸어요. 주말에는 아버지의 차를 빌려 여자 친구와 바다로 드라이브를 갔습니다. 기분이 상쾌해져서 다케시나 다케시 주위에 어른거리는 작은 여자애는 아무래도 좋아졌어요.

 

그런데 월요일에 강의실로 가기 위해 캠퍼스를 걷는데 뒤에서 다케시가 엄청난 속도로 따라와서 말하는 겁니다.

 

“재미있어졌어."

 

“갑자기 뭐야."

 

“금요일 밤에 또 그냥 막 건 전화를 여자가 받았는데, 혼자 사나 봐. 몇 번을 다시 걸어도 개가 받고 나중에는 자동 응답으로 돌렸는데 그것도 그 여자 목소리였어. 덕분에 유키라는 이름까지 확실히 알았지. 바보라니까."

 

"너는 여태 그런 짓에 열을 올리냐?"

 

유지는 한심한 기분이 들었어요. 다케시는 유지도 그런 장난을 재미있어한다고, 적어도 다퉈서까지 말릴 생각은 없다, 묵인한다고 생각하니까 의기양양 보고했겠죠. 유지는 자신은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분해했어요.

 

"그런 짓을 계속하다가는 큰코다친다."

 

"전혀 문제없어. 이번 유키라는 여자는 기개가 있어. 내 목소리를 전부 녹음해서 경찰에 가져가겠다든가 자기 애인이 조직 폭력배라든가 역탐지해 주겠다든가 꽥꽥 되받아친다니까. 아주 웃겨서. 주말에는 계속 밤이고 낮이고 기분이 내킬 때는 몇 시간쯤 줄기차게 십 분 간격으로 걸어 주고 있어. 그쪽이 자동 응답으로 돌려도 상관없어. 녹음테이프가 가득 찰 때까지 내 메시지를 녹음해 줄 테니까. 그러면 그 여자한테 일이 있는 녀석이 걸어도 용건을 녹음할 수 없겠지? 꼴좋다."

 

 

 

'이 녀석은 돌았어.'

 

유지는 다케시의 빨간 눈을 바라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십 분간 격으로 장난 전화를 걸었으니 수면 부족이겠죠.

 

그날은 가능한 한 다케시에게서 떨어지려고 노력했어요. 여자친구의 말처럼 다케시와 어울리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운 나쁘게 저녁에 여자 친구랑 함께 교내의 실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다 거기에 있는 다케시를 보고 말았죠.

 

수영장은 대학교 시설 중 하나로 수영부나 다른 운동부가 연습에 쓰지 않을 때는 아주 값싼 요금으로 일반 학생에게 개방했어요. 덕분에 북적거렸죠. 색색의 수영복을 몸에 두른 여학생들이 즐겁게 환성을 지르며 물보라를 튀겼어요.

 

다케시는 풀 사이드의 칸막이 너머에서 그런 여자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어요.

 

 

 

"소름 끼쳐."

 

유지의 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돌아가자. 난 저런 사람에게 수영복 차림을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아."

 

유지는 지당한 요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되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수영장을 끼고 다케시와 정반대 위치에 있는 여자애를 발견했어요.

 

또다시 수영장 너머로 가만히 다케시를 바라보았죠.

 

“잠깐만."

 

 

 

유지는 여자 친구를 슬쩍 찔렀어요.

 

"저것 봐. 저기에 여자애가 있지? 보여?"

 

여자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응. 있네."

 

둘은 슬슬 풀 사이드로 돌아갔어요. 여자애는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다케시 역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수영복 차림의 여자들을 보고 있었어요.

 

"저 애야. 저 애를 노상 본다니까."

 

여자 친구는 "귀여운 애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고서 고개를 갸웃거렸죠.

 

"그렇게 어린애가 아닌 것 같은데, 얼굴은 어른이야. 몸이 조그마할 뿐이야."

 

"그럴 수가 있나?"

 

"그래도 예쁜 애다. 미소녀인걸."

 

유지는 머뭇거리는 여자 친구를 잡아끌고 다케시에게 걸어갔어요. 말을 붙여도 다케시는 흘끗 시선을 올렸을 뿐 수영장 관찰에 흠뻑 빠져 있었죠. 제대로 대답도 하지 않았어요.

 

유지는 때를 보아서 소곤소곤 말했습니다.

 

"아까부터 수영장 저쪽에 있던 굉장한 미소녀가 널 계속 쳐다보는데 알고 있어?"

 

"뭐? 어디?"

 

다케시는 허둥지둥 고개를 들고 찾기 시작했어요. 유지는 여자애가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알려 주었죠. 유지의 여자 친구는 불쾌한 듯 입술을 일그러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어디? 아무도 없잖아."

 

다케시가 부루퉁하게 말했을 때 유지의 여자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여자애는 줄곧 같은 장소에 있었거든요. 수영장을 끼고 다케시의 바로 맞은편에요.

 

다케시에게는 보이지 않았죠.

 

"너도 속을 때가 있구나."

 

유지가 그렇게 말하자 다케시는 유지를 때리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러고서 훔쳐보듯 유지 여자 친구의 봉긋한 가슴 주변을 쓱 훑었어요.

 

“가자."

 

여자 친구의 재촉에 유지는 자리를 떴습니다. 목덜미가 오싹했어요.

 

“저 사람은 정말로 여자애를 보지 못하네.”

 

"이제 믿겠어?"

 

유지는 바깥에 나오기 전에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 자리에 있는 여자애를 확인하려 했어요. 여자애는 마침 반대쪽 출구로 가던 참이었죠. 그쪽은 로커룸으로 이어져 있어서 바깥으로 나가는 문은 없었어요.

 

"여기에 있어 봐.”

 

유지는 여자 친구에게 말해 놓고 여자애 뒤를 쫓았어요. 작은 다리는 뜻밖에 재빠른 속도로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유지는 전속력으로 달려 층계참에서 겨우 여자애를 따라잡았어요.

 

"얘!"

 

불러 세우자 작은 여자애는 발을 멈추었죠. 그대로 가만히 섰어요. 짧은 목덜미로 엿보이는 피부는 인간 같지 않게 새하였죠.

 

 

 

어둑한 층계참에는 둘 외에 아무도 없었어요. 멀리 수영장 쪽에서 이따금 물소리와 떠들썩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와서는 높은 천장에 부딪혀 울렸죠.

 

유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심장은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왜 이렇게 무서운지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무서운 만화를 읽고서 불을 끄고 혼자 잠들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어쩐 일인지 벽장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쩍 벌린 새카만 입 같은 어둠에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 일어나 불을 켜거나 문을 닫는 일조차 할 수 없던, 결국 덜덜 떨면서 땀을 흠뻑 흘리며 새벽까지 벽장과 눈싸움을 했을 때의 심정.

 

유지는 여자애의 등을 바라볼 때도 꼭 그런 기분이었다고 나중에 얘기했답니다. 그만큼 무시무시했다고요.

 

그래도 여자애를 쫓아온 유지는 이미 초등학생이 아니었습니다. 큰맘 먹고 계단 마지막 세 단을 뛰어내려 여자애의 어깨를 잡았죠.

 

여자애가 몸을 돌렸습니다.

 

순간 유지는 비명을 질렀어요. 여자애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자애의 반듯한 얼굴은 변함없었어요. 하지만 눈이 달랐죠. 여자애의 눈은 눈처럼 새하얗고 눈동자가 없었답니다.

 

유지의 외마디 비명이 울리고 나자 여자애는 싱긋 웃었어요. 그러고는 말했습니다.

 

“이번 주 주말이야."

 

다음 순간에는 이미 유지의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쫓은 유지는 로커룸 바깥에 있는 초록색 공중전화 수화기가 누가 슬쩍 건드려 흔든 것처럼 흔들거리는 광경만 목격했답니다.

 

여보세요? 듣고 계세요? 어라? 지금 잠깐 혼선되었나 보네요. 다른 소리가 들렸어요. 당신 전화는 자주 혼선되나요?

 

이번 주 주말이야. 유지는 여자애가 한 말의 뜻을 놓고 고민했어요. 틀림없이 주말에 다케시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거니 했지요. 자신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결심했어요.

 

주말에 묵어도 되냐고 물으니 다케시는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마침 엄마가 또 아버지한테 가서 집이 빈다면서요.

 

“너 아직 유키라는 여자한테 전화를 걸어?"

 

"당연하지. 녀석은 반응이 있어서 재미있거든. 너도 할래?"

 

문제의 주말 밤에 다케시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을 때, 유지는 온몸에 닭살이 돋는 기분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정말로 십 분 간격으로 걸더랍니다. 상대는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겠죠.

 

때때로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두 시간은 걸어 댔을까요. 추잡하기만 한 서투른 농담을 날리고 더러운 말을 쓰면서.

 

다케시의 방 시계가 오전 두 시를 가리켰을 때 유지는 문득 주변공기가 차가워졌음을 깨달았어요. 등이 서늘했죠.

 

“어라, 씻고서 물기를 제대로 닦지 않아서 그러나, 한기가 드네.”

 

다케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유지는 밤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다케시는 서너 번째 전화를 건 참이었어요. 유키라는 여성은 바로 찰칵하고 끊어 버렸어요. 다케시는 수화기를 쥔 채 "이 여자, 슬슬 한계가 왔어" 하고 웃었습니다.

 

"어?"

 

다케시는 수화기를 바라보았어요.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네.”

 

다시 귀에 대고 감이 먼 소리를 들으려고 미간에 주름을 모았어

 

“이상하네, 끊었을 텐데. 혼선인가?"

 

다케시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대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큰 소리로 아우성쳐서 유지는 다케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다케시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고서야 알았죠.

 

"아파! 아파!"

 

다케시는 그렇게 외쳤어요. 그도 그럴 게 수화기가 다케시의 왼쪽 귀를 끌어당겼거든요. 그에 저항하며 머리를 떼려고 하자 귓불이 고무처럼 늘어나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새빨개졌어요.

 

 

 

"살려 줘!"

 

외마디 비명을 지른 순간 다케시의 머리 왼쪽은 수화기에 거세게 부딪혔고 그 바람에 다케시는 바닥에 쓰러졌어요. 열심히 수화기를 떼어 내려고 바르작거렸죠.

 

유지는 움직일 수 없었어요. 몸이 얼어붙고 무릎이 덜덜 떨려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그저 지켜만 보았죠.

 

유지 앞에서 다케시는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수화기 속으로 끌려들어 갔습니다. 먼저 머리 왼쪽이 마치 흡착기로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납작하게 변형돼 용서 없이 빨려 들어갔지요.

 

머리가 반쯤 빨려 든 다케시는 더욱 격렬하게 발버둥 쳐댔어요. 왼손은 수화기를 들고 계속 떼어 내려고 했죠. 오른손도 가세해 이를 악물고 힘을 주었어요. 유지는 그때 처음으로 다케시의 빼빼 마른 팔에 드러난 핏대를 보았습니다.

 

다케시는 머리에 수화기를 딱 붙인 채 괴로움과 두려움으로 온방을 미쳐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책상에 부딪혀 의자를 쓰러뜨리고 벽을 걷어찼어요. 그 결에 전화기 코드가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더니 순식간에 벽의 모듈러잭에서 너무 쉽게 빠져 버렸죠. 다케시는 공중제비를 돌듯이 바닥에 쓰러졌어요.

 

수화기는 계속해서 다케시를 빨아들였지요. 뱀이 포획물을 삼키는 것처럼. 청소기가 커다란 쓰레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다케시는 버둥거리면서 팔을 휘두르다 유지의 다리를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들러붙었어요. 유지는 정신없이 다리를 차며 길을 걷다 달라붙은 쓰레기를 털어 내는 것처럼 다케시의 손을 떼어 내쳤죠. 유지에게 내팽개쳐진 힘으로 주룩 하는 소리를 내며 다케시의 얼굴 왼쪽이 수화기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다케시는 유지를 계속 부르면서 하나만 남은 오른쪽 눈을 뒤룩거리며 유지를 찾았어요. 눈 아래는 새빨갛게 충혈되고 눈꼬리에는 피눈물이 맺혔습니다. 어떻게든 해 줘! 하고 애원하는 목소리는 갈라졌죠. 그래도 유지는 움직이지 못했어요.

 

수화기는 머리의 왼쪽 반을 빨아들이더니 기세가 붙은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다케시의 머리를 삼켜 버렸답니다. 비명이 뚝하고 멈추었어요.

 

다음은 목. 그러고는 어깨에 부딪혀서 속도가 느려졌죠. 수화기는 생명체처럼 머리를 흔들며 커다란 짐을 삼키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다케시의 손이 허공을 휘적거리며 허공을 잡고 수화기에 들러붙어서 죽어라 버텼어요. 두 다리는 끊임없이 바닥을 치며 버둥버둥 날뛰었습니다.

 

왼쪽 어깨가 수화기 속으로 사라졌을 때 둔탁한 소리가 났습니다. 유지는 '어깨뼈가 부러졌구나' 하고 망연히 생각했죠.

 

왼쪽 어깨가 빨려 들어가 버렸으니 왼팔은 자유를 잃었어요. 쑥쑥 삼켜지면서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허망하게 파닥거릴 뿐이었죠. 마침내 죽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어깨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또다시 아득아득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빨려 들어가는 오른팔은 바닥에 손톱을 꽉 세우고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으나 소용없었죠. 손목 부분에서 한번 걸리더니 끌어당기는 힘으로 높은 압력이 가해지자, 기력 없이 펼친 손바닥이 빨개지며 마침내 다섯 손가락은 일제히 피를 쫙 뿜었어요. 그렇게 손바닥도 빨려 들어갔습니다. 피가 새하얀 벽과 다케시가 마음에 들어 했던 소녀 누드 사진 달력에도 튀었죠.

 

나머지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다케시는 저항을 그만두지 않았지만 힘은 점점 약해졌죠. 유지의 눈에 남은 건 가장 마지막에 무릎 아래가 나란히 빨려 들어가 버릴 때까지 흐트러진 라인 댄스를 추듯 허공으로 발길질하는 다케시의 두 발이었습니다. 

 

 

 

수화기는 다케시를 완전히 삼켜 버리자 움직임을 멈추었어요. 그러고는 바닥에 뒹굴었습니다.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유지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습니다.

 

그때 수화기의 귀를 대는 부분, 다케시를 빨아들인 부분에서 아주 작고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손이 쑥 나왔습니다.

 

팔꿈치 앞쪽이에요. 오른손이었죠. 요령 좋게 팔을 굽히더니 수화기 손잡이 부분을 잡고 쑥 들어 올려 자력으로 수화기를 전화기의 후크 스위치 위로 돌렸습니다. 달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걸로 모든 게 끝났습니다.

 

간신히 움직일 수 있기까지 얼마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는지 유지는 알 수 없었어요. 어떻게든 엉덩이를 들고 기다시피 해서 전화기에 다가갔어요. 만질 수 없었어요. 죽어도 할 수 없었어요.

 

전화기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전화의 숫자 버튼 '5' 옆에 눈이 빠져라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작은 붉은 점이 묻었을 뿐이죠.

 

다케시의 피였습니다. 벽과 달력에 튄 것과 똑같은 생생한 피였어요.

 

바닥 위에는 잊고 간 게 또 하나 있었죠. 유지는 그걸 주워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까지 무언지 몰랐답니다.

 

빨려 들어갈 때 빠져 버린 다케시의 오른손 검지손가락 손톱이었죠.

 

그게 한계였습니다. 유지는 손으로 입을 막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 도망쳤습니다.

 

그러고서 다케시의 집 가까이도 가지 않았어요. 다케시는 그 후로 계속 행방불명 상태랍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제 슬슬 마무리예요. 어라, 한숨을 쉬시네요?

 

유지는 자신이 눈앞에서 본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오랫동안 홀로 생각했습니다.

 

역시 여자애는 전화의 정령이었어요. 전화를, 회선을 상스러운 목적으로 쓰는 다케시를 용서하지 못하고 벌을 내리기 위해서 찾아온 겁니다. 다케시를 감시했던 이유는 다케시가 어떤 의도로 장난 전화를 거는지, 그만둘 마음은 있는지, 반성의 기색은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눈동자가 없는 새하얀 눈을 가진 아이 같은 전화의 정령들.

 

유지는 오랫동안 쓴 물건과 기물에도 영혼이 깃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다케시는 어디로 끌려갔을까요? 죽어 버렸을까요?

 

대답은 사건으로부터 한 달 정도 후에 유지가 여자 친구와 전화로 얘기할 때 밝혀졌습니다.

 

그때 유지는 사건이 있고 처음으로 수화기를 만졌어요. 그때까지 무서워서 아무리 노력해도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지만,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전화를 받지 않는 유지를 수상하게 여긴 여자친구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수화기를 손에 들었죠.

 

유지의 전화에는 아무 이상 없었습니다. 여자 친구를 어르며 얘기해 나가는 사이에 점점 공포가 옅어졌어요. 전화로 여자 친구의 웃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기쁨과 안도감으로 유지도 기운차게 웃었죠.

 

 

 

 

그런데 전화가 혼선되었어요. 여자 친구의 목소리 외에 다른 누구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어요. 아주 작게 속삭이는 것처럼.

 

목소리의 주인은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는데 감이 멀어서 희미하게밖에 들리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혼선이네.”

 

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런 것 같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 보지 않을래?"

 

여자 친구는 키득거리며 웃었습니다. 유지도 빙글거리며 귀를 기울였죠.

 

유지는 착각이 아니라고 했어요.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요.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비명이었습니다. "살려 줘. 살려줘!"라는 다케시의 목소리였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여자 친구는 알아듣지 못한 거겠죠. 유지는 "응" 하고 대답했어요. 덜덜 떨리는 턱을 악물면서.

 

그래요. 당신의 전화도 때때로 혼선되죠? 그게 전부 다 진짜 혼선은 아니에요. 들리는 목소리 중에는 도움을 청하는 절망적인 외침도 섞여 있답니다. 벌을 받는 사람들의 외침이요. 귀를 기울이고 주의 깊게 들으면 분명 들릴 겁니다.

 

이걸로 제 얘기는 끝이에요.

 

예, 그래요. 전화를 반사회적인 목적으로 쓴 '전화 범죄자'는 그에 마땅한 벌을 받는답니다. 전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 출구 없는 회선 속 어둠에 갇혀 도와달라고 외치면서 죽을 때까지 방치당하죠. 또는 노예로 혹사당할지도 몰라요. 회선을 항상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늘 내부에서 청소와 보수를 해 두어야 하거든요. 위험한 중노동이에요.

 

어라라, 웃으셨어요? 그런 건 NTT 한국의 KT와 같은 일본 전신전화 주식회사의 일이라고요? 그들은 요금만 내면 손님으로 대해 주니까 장난 전화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요?

 

예, 맞아요. 인간은 그렇지요. 하지만 저는 다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죠? 물건에도 영혼이 깃들 때가 있어요. 영혼이 있는 존재에는 반드시 자정 작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언제든지 자신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해 두려는 기능이요.

 

왜 그렇게 웃으세요? 네? 만든 얘기? 제가 지어낸 얘기로 당신을 협박하려고 한다는 겁니까?

 

 

 

 

예,에~네? '도시 전설'이 뭡니까?

 

오호....... 그럴싸하게 지어낸 얘기를 진짜로 믿는 사람도 있다고요? 네? '빨간 마스크'가 그랬다는 겁니까?

당신은 별 걸 다 아시네요.

 

제 얘기가 당신이 말하는 '도시 전설'인 줄 어떻게 알죠? 예? '친구의 친구 체험담'이라고 얘기를 꺼낸 게 그렇다고요? '도시 전설'이란 건 다 그런 식으로 시작되니까 'foaf' 이야기라고 한다고요? “friend of a friend'. 그랬군요.

 

이것 참, 그런가요.

 

사실 그렇답니다. 전부 진짜는 아니었어요. 제 동생, 당신의 전화로 괴로워하는 여성의 친구라기보다 일 동료가 실제로 겪은걸 제 나름대로 각색한 얘기였어요.

 

그 외에 또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전화의 정령들은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들은 조직을 이루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일본 전국에, 전 세계에 전화기가 몇백만 대, 회선이 몇천만 개 있을지. 같은 수만큼 존재한대도 이상하지 않죠.

 

그들은 조직을 이루어 분담을 정해 전화 회선 치안을 유지한답니다. 안쪽에서 회선을 모니터 하고 때로는 인간의 모습을 빌려 사회에 침투해 자신들의 회선을 써서 말단에 전화기를 두고, 함정 수사도 하죠.

 

예, 함정 수사.

 

당신, 아직도 웃으시네요. 하는 수 없죠. 제 일은 끝났습니다. 집행 명령이 떨어졌을 때 피고인에게 그걸 설명해 주는 게 제 일이라서요.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무시무시한 비명이 들려왔다. 바닥을 차고 저항하는지 쾅쾅하고 묵직한 소리도 들렸다. 임무라고는 해도 이것만은 몇 번을 들어도 기분이 좋지 않다.

 

비명은 금세 그쳤지만 소리는 십 분이나 들렸다. 기다리는 내 곁에서 동생은 머리를 빗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수화기 안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말했다.

 

“강제 집행을 종료했습니다.”

 

수화기가 후크 스위치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고했어" 하고 한마디 치사를 하고 이쪽 수화기도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거야 원."

 

나는 목덜미를 긁었다.

 

"조금은 이해력이 좋아져서 뉘우치면 좋으련만. 모처럼 형을 집행하기 전에 기회를 주었는데 말이야."

 

"하는 수 없어. 질리는 법이 없는걸. 오빠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동생은 어렴풋이 빛날 정도로 새하얀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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