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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담

영원한 승리_불문율_미야베 미유키_추리소설_1/3

by SpiderM 20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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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영원한 승리> 1편

 

 

사야마 히로미는 백화점이 문을 열 시간을 가늠해 상복을 사러갔다.

 

엄마인 이사코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이왕이면 고급품을 사라고 했다. 입으로는 '예, 알겠어요' 하고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세일 품목에서 고르자고 결심했다.

 

역 승강장에 서 있으려니 이마에 땀이 뱄다. 그런데 에어컨을 튼 지하철에 타자 두 역을 채 지나기도 전에 닭살이 돋았다.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거리는 찌푸린 하늘 아래 심각한 불황에 빠진 듯 보이고, 낮게 낀 구름에 머리를 눌린 채 늘어선 빌딩이 다글 목을 웅크린 듯하다.

 

출입구 문에 찰싹 붙어서 상공을 쳐다보았다. 한참 후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어젯밤 열시쯤, 가쓰코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쓰코는 이사코의 맏언니로 올 십일월에 생일을 맞이했다면 쉰다섯 살이 될 예정이었다. 이사코가 마흔다섯 살이니까 열 살이나 터울진 자매다. 가쓰코와는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쓰코 언니는 엄마가 아직 어릴 적에 집을 나가 독립해 버린 사람이니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이사코가 가쓰코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병원에 간게 어제 점심이 지나서였다. 가쓰코의 몸 구석구석에 암세포가 퍼져 손쓸 도리가 없음을 가족 모두가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시점에서 이미 각오는 되어 있었다. 드디어 글렀나 싶었다.

 

하기야 히로미 역시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했고 따지자면 태연한 편이었지만. 핏줄을 잃었다는 막연한 슬픔은 있지만 눈물도 흐르지 않았고, 당연히 목 안쪽에서 북받쳐 오르는 듯한 오열도 없었다. 그만큼 가쓰코 이모와는 소원했다. 교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히로미나 가즈키에게는 거북한 존재였다. 명절에 얼굴을 마주쳐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하고 인사하고 나면 이을 말이 없었다. 

 

히로미는 가즈키의 말에 '지나친 생각이야'라며 웃었지만 나중에 이사코 역시 비슷한 얘기를 꺼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자립한 여자의 선두 주자였지."

 

히로미는 감탄하는 것도 같고 딱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엄마의 목소리를 말없이 들었다.

 

“여하튼 일은 똑 부러지게 했던 모양이니까."


 

 

가쓰코는 장학금을 받아 국립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줄곧 영어를 가르치다가 재작년 봄에 시험에 붙어서 사이타마 현의 작은 시립 중학교 교감이 된 참이었다. 여자 교감은 곤란하다든가 실행력이 없다든가 하며 반대하는 육성회에도 밀리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일했던 모양이다. 최근에는 교장보다 교감이 학교의 실세라고 수군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히로미의 엄마 이사코와 이사코의 바로 위 언니인 나쓰코 이모도 상고를 나와 곧바로 취직했다. 가쓰코와 다섯 살 터울 진 이사오 외삼촌은 대학까지 나왔지만 가쓰코 이모처럼 일류 대학이 아니라 본인도 '지방에 널리고 깔린 대학 중 하나'라며 웃을 만한 곳인데다.

 

경제학부를 나온 주제에 전공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류 기계 메이커에 아슬아슬하게 입사했다. 지금은 총무부에 있다. 부장대리라는 직함이 붙어 있지만 몸 건강하고 말만 예의 바르게 할 줄 알면 누구든 할 수있다라고 하니까 사실은 그다지 높지 않은 직책이리라.

 

이사코의 아래로는 마키코라는 두 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마키코 이모는 더 굉장해서 결국 고등학교에도 가지 않았고 중학교에서도 '선생님, 내가 없어져서 후련해하는 거 아녜요?"라고 했을 정도의 학생이었다고 한다. 물장사 경험이 있는 것도 이혼과 재혼을겪은 것도 마키코 이모뿐이다.

 

열아홉 살 때 했던 첫 번째 결혼은 이 년 만에 끝났다. 다음 결혼은 스물세 살 때, 두 번째 남편과는여태껏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꾸미기 좋아하고 나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작은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도, 그러니까 히로미의 이모부가 되는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균형이 잘 맞는 것같다.

 

이모부가 작년에 성인식을 맞아 기모노를 차려입은 히로미를 핥듯이 바라보는 바람에 히로미는 실로 불쾌한 기분을 맛본 적이 있다. 그러고 나서 근처까지 왔으니 함께 밥이라도 먹지 않겠냐는 전화가 직장으로 몇 차례 걸려와 또 찝찝한 느낌을 받았다. 계속 거절만 할 수 없어서 서너 번째 전화가 왔을 때 친한 동료 둘을 데리고 나갔더니, 둘이 화장실에 간 사이 '히로미, 아직 어리네'라는 말을 들었다.

 

"왜요?"

 

"이런 때 친구를 데려오면 쓰나. 어른이 되고 싶지? 그러면 말이야."

 

어른이 되든 못 되든 당신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모부는 다다 준지라고 한다. 히로미가 일하는 융자과에도 '준지'라는 이름의 상사가 있는데, 연쇄 반응인지 상사마저 밝히는 인간으로 보이니 이상하다. 장례식에는 친척들이 모두 모이니 당연히 준지 이모부도 만나야 한다. 그걸 생각하자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히로미는 유라쿠초 역에서 내려 마리온 세이부 백화점이 들어서 있는 대형 복합 건물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세이부 백화점부터 들러야지.'

 

엄마는 '미쓰코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대형 백화점에서 사 와. 예복은 미쓰코시에서 맞추는 편이 좋아' 하고 말했다. 이사코에게는 그런 단순한믿음이 있다. 뭐가 좋은지 모르지만 좋단다.

 

매장에 가니 붙임성 좋은 여점원이 히로미의 예산을 묻고서 함께 이것저것 골라 주었다.

 

"여름에 입으면 덥고 겨울에 입으면 춥지만 역시 사계절용이 좋아요. 이런 검은 예복을 팔 때 코르사주나 브로치로 장식하면 축하연 때 나들이 옷으로도 쓸 수 있다며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저는 그건 추천하지 않아요. 역시 부자연스러운걸요. 손님은 아직 젊으시고 궂은일보다 경사에 참석할 일이 훨씬 많을 테니까 상복은 부담 없는 가격의 제품을 한 빌 가지고 계시면 돼요."

 

점원의 명쾌한 주장을 듣고서 디자인이 약간 귀엽고 실루엣이 예쁜 상복을 골랐다. 상복을 입으면 여자는 누구든 삼십 퍼센트쯤 예뻐진다. 탈의실의 커다란 거울에 전신을 비추니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가쓰코 이모의 죽음은 어른이 되고서 처음으로 상복을입을 기회를 준 귀중한 사건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이모는 가와고에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아직 지지칠 년밖에 되지 않은 깔끔한 건물인데 입주 세대 수가 적어서 주민회관 같은 시설은 없다. 학교 관계자나 옛 제자 등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이 제법 많으리라는 건 분명했기 때문에 밤샘과 장례식에는 아파트에서 차로 오 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가와고에 제전'이라는 작은 홀을 빌리기로 했다.

 

가쓰코는 독신으로 양친도 이미 타계했다. 상주는 남동생인 이사오 외삼촌이 맡았다. 총무 부장대리인 외삼촌은 역시 일 처리가거침없었다. 도우러 와준 학교 관계자며 장례 회사 직원들과 함께 일을 척척 진행했다.

 

제단은 하얀 국화꽃에 묻혔다. 중앙에 장식한 영정은 히로미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가쓰코 이모가 가장 이모다워 보이는 표정을 조금 화난 듯한 분위기로 고지식하게 입을 한일자로 다문짓고 있다. 여기에 모인 덜된 동생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밤샘부터 고별식 사이에는 엄청 손이 부족한 때가 아닌 한 유족은 꽤 무료한 법이다. 히로미와 가즈키는 밤새 깨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런 것보다 너, 공부하지 않으면 대학에 또 떨어진다. 이번에 떨어지면 웃어넘길 일이 아니잖니. 지금도 웃어넘길 일은 아니겠지만."

 

마키코 이모의 노골적인 말에 가즈키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마키코 이모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다. 나쓰코 이모 부부에게 딸이 한 명, 이사오 외삼촌 부부에게 아들이 두 명 있지만 결혼해서 직장 관계로 지방에 살거나 지방 대학에 다니거나 했다. 세 명 다 오늘 밤 밤샘을 하러 올 수가 없어서 내일 고별식부터 참석하기로 했다. 덕분에 히로미와 가즈키는 좋은 안줏거리 취급이었다.


 

흰색과 하늘색 막으로 둘러친 다섯 평쯤 되는 방이다. 

 

"요즘에는 다들 이게 편하다고 하세요. 무엇보다 무릎 꿇고 앉지 않아도 되니까요."

 

담당자가 설명하자 마침 의자에 앉으려던 나쓰코 이모가 투덜거렸다.

 

“양복 입은 사람이야 좋겠지만 기모노는 앉기 어렵네.”

 

기모노의 옷자락을 정리해 엉덩이 부분에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신경 쓰며 겨우겨우 자리에 앉는다. 나쓰코 이모는 남매 중에 혼자만 이빨이 약한지 아직 마흔일곱 살인데도 이가 대여섯 개밖에 남지 않았다. 틀니 탓에 목소리가 살짝 우물거린다. 본디 말을 똑 부러지게 하지 않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한층 얌전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불평하는 일은 드물었다.

 

"언니, 의자에 앉기 어려운 이유는 옷 때문이 아닐걸? 나이 탓이야. 나이."

 

마키코 이모가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이는 다다미를 좋아하는 법이지" 하고 웃으면서 히로미를 홱 돌아보더니 "나나 히로미는 의자가 좋아. 젊으니까"라며 가슴을 강조하는 것처럼 꽉 졸라맨 오비기모노 허리에 두르는 띠 앞을 팡 하고 두드렸다.

 

“너랑 히로미를 똑같이 생각할 수야 없지.”

 

준지 이모부가 끼어들었다. 말은 마키코 이모에게 걸고 있지만 얼굴과 몸은 히로미를 향했다. 

 

 

“어머나.”

 

마키코 이모는 깔깔대며 웃었다. 제 아무리 마키코 이모라도 오늘은 매니큐어를 지웠다. 대신 평소처럼 새빨간 립스틱이 살짝 튀어나온 앞니에 묻어 있다.

 

“뭐 어때. 히로미, 예뻐졌는걸. 제법 여자 냄새가 난단 말이야. 남자라도 생겼어?"

 

준지 이모부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히로미는 찻잔을 쟁반에 얹고 일부러 이모부랑 거리가 지도록 걸었다.

 

"한창때니까. 싸구려 차도 갓 달인 놈은 향긋하다잖아."

 

이사코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고는 퉁퉁 부은 히로미의 얼굴을 곁눈으로 흘끗 본다. 히로미는 화가 난 눈으로 엄마에게 호소했다.

 

"내버려둬. 그냥 놀리는 거니까.”

 

이사코는 히로미 쪽으로 몸을 굽히며 속삭였다.

 

"하지만.”

 

엄마에게 이모부가 끈질기게 따라다닌 일은 얘기하지 않았다. 차라리 털어놓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했다.

 

"밤샘은 일곱시부터지?"

 

준지 이모부가 벽에 걸린 둥근 시계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아직 한 시간 넘게 남았네. 나는 차보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

 

"숙취라서 그래."

 

마키코가 놀렸다.

 

"근처에 카페 정도는 있겠지? 히로미, 커피 마시러 가자."

 

"저는...."

 

"뭐 어때, 가자. 그런 거 내려놓고 이모들한테 맡기면 되잖아."준지 이모부가 히로미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았다. 당황한 누나의 얼굴을 보았는지 가즈키가 끼어들었다.

 

"나도 배고프다. 스님이 독경하는 중에 꼬르륵거리면 창피하니까 뭐라도 먹고 올까? 이모부, 같이 가요."

 

이모부는 눈에 띄게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히로미는 애 같다고 생각했다.

 

"뭐야, 너는 오지 마. 히로미랑 데이트할 거니까."

 

"얻어먹을 수 있는 기회는 놓치지 말자는 주의예요. 괜찮죠?"

 

가즈키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때마침 담당자와 미팅을 마친 이사오 외삼촌과 히로미의 아버지가 돌아와 출입구에서 부딪힐뻔했다.

 

"뭐냐. 가즈키, 어디 가니?"

 

"배고파서. 준지 이모부가 사준대."

 

"지금 주먹밥을 부탁해 뒀다. 다들 허기 전에 뭐라도 배에 넣어 두는 게 좋아."

 

"이모부는 커피가 마시고 싶대요.”

 

“계단 아래에 자판기가 있어."

 

이사오 외삼촌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즈키, 사람 수만큼 사올래?"

 

가즈키는 "네" 하고 대답하며 나갔다. 히로미는 아버지와 이사오외삼촌 등 뒤에 숨어 날름 혀를 내밀며 웃음을 참았다.

 

밤샘이 시작되고서야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밤샘에 찾아온 사람은 혼자 사는 여자의 장례식치고는 파격적일만큼 많았다. 다들 태풍의 영향으로 날씨가 거친데도 비바람을 뚫고 일부러 걸음 해 주었다. 히로미는 유족 열 뒤쪽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눈을 내리뜨면서, 가쓰코 이모는 무섭고 재미없는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우수한 교사였던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 놓아 우는 사람이야 없지만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거나 명복을 빌다 말고 목소리가 갈라지는 여자들은 있었다. 연령층은 사십 대 중반부터 삼십 대 초반 정도다. 가쓰코 이모가 교사로서 기력과 체력이 가득하고 열정에 불타던 무렵의 제자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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