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기담

<화염 큰북> 미야베 미유키의 영혼 통행증 중 1

SpiderM 2024. 5. 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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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영혼 통행증 - 에도시대물-편에서 1편 <화염 큰북> 편입니다. 한 마을의 불을 지켜주는 신에 대한 전설입니다. 듣고 버리는 이야기 방에서 아무나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주인공의 역할은 참으로 묘하고 신비롭습니다.

미야베-미유키-화염-큰북
<화염 큰북>

 

음력 6월 초하룻날, 어머니를 모시고 뎃포즈 총포를 다루는 관직에 있던 이노우에가 이곳에서 총을 쏘는 연습을 했다고 하여 붙은 별칭 이나리 신사에 후지산 참배를 갔던 도미지로는, 진짜 영봉 후지산의 용암으로 만들었다는 높이 11간(약 20미터) 짜리 참배용 후지산 옆에서 그리운 스승과 딱 마주쳤다. 하나야마 도로라는 화공이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며 비쩍 말라서 턱이 뾰족한데 눈알만은 약간 튀어나와 부리부리한 외모가 아호의 유래라는 이 사마귀 화공도로는 사마귀라는 뜻은, 사람 됨됨이가 다정하고 가르치는 솜씨도 좋았다.

도미지로는 열다섯 살 때 '남의 집 솥의 밥을 먹고 오라'는 아버지 이헤에의 분부에 따라 신바시 오와리초의 목면 도매상 '에비스야'에 고용살이를 나갔다. 그쪽에서는 도미지로를 미시마야가 맡긴 사람으로 정중하게 대하며 목면 도매 장사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다.

에비스야의 주인은 밖에서 여자를 만들어 낳은 아이를 가게에 들이고 고용살이 일꾼으로 마구 부린다는 추한 일면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서 노래와 샤미센 같은 예능은 물론 나팔꽃을 재배하거나 동박새를 키워 보는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주인의 스승이었던 하나야마 도로는, 종종 에비스야에 드나들며 안방에서 그림의 기초를 가르쳤다. 당시 도미지로는 고용이를 시작한 지 반년 남짓 만에 대행수 격이 되어 이래저래 주인 옆에 붙어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로 선생과도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실은 자신도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자 도로 선생은 흔쾌히 교섭에 나서 주었다. 덕분에 도미지로는 주인과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었으니 실로 고마운 일이다.

화공이 그런 배려를 해 준 까닭은 (물론 도미지로가 평범한 고용살이 일꾼이 아님을 알고서 한 일이기는 하지만) 에비스야의 주인이 변덕스러운 데다, 초보인 주제에 그림의 감식안이 있다고 떠들고 다녀서 가르치는 보람도 없고 재미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본인이 몰래 가르쳐 주었다.

도미지로는 마치 타고난 듯 처음부터 소질을 보였다. 행상꾼으로 시작하여 미시마야를 일으킨 이헤에와 오타미에게도 아름다움을 살필 줄 아는 능력이 있었을 테니 어쩌면 핏줄의 힘일지도 모른다.

에비스야의 주인이 또 다른 취미로 마음을 옮길 때까지 대략 2년 동안 도로 선생은 열심히 가르쳐 주었고 도미지로는 열과 성을 다해 배웠다. 어느덧 친해지고 나서 알게 되었지만, 도로도 작은 상가출신이었다. 어떻게든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열두 살 때 집을 뛰쳐나와 고이시카와의 고케닌 쇼군 직속의 하급 무사로, 하타모토 밑에 있으며 쇼군을 직접 대면할 자격이 없는 자이자 화공이기도 했던 하나야마 쇼지로(아호는 비쇼)의 제자로 들어갔고, 허드렛일을 하며 그림을 배웠다고 하니 도미지로와는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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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삼십 대 중반, 지금은 마흔이 넘은 하나야마 도로는 후지산 참배 자리에서 재회하고 보니 살쩍에 흰머리가 드문드문 섞였고, 세련된 자수 꽃무늬가 있는 검은 하오리일본 전통복식에서 옷 위에 입는 짧은 겉옷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회를 기뻐했다. 그림 선생은 도미지로가 에비스야에서 미시마야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느냐는 물음에,

“그저 손장난이기는 합니다만."

특이한 괴담 자리의 듣고 버리기를 위해서라고는 말할 수 없어서 그리 대답한 도미지로에게, 하나야마 도로는 같이 온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니혼바시도리초 4번가에 있는 문방구 도매상 '쇼분도'의 행수 우두머리로 이름은 가쓰이치, 나이는 도로와 도미지로의 중간쯤이려나. 누에콩에 눈 코 입을 붙인 듯한 인상으로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에 붙임성이 좋다.

"저는 붓이나 먹뿐만 아니라 그림 도구 전부를 가쓰이치 씨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만의 연줄이 있어서 좋은 물건을 싸게 매입해 주니 꼭 이용해 보십시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옆에 있던 가쓰이치도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도미지로는 "저야말로” 하며 예의상 인사를 해 두었다.

집에 가는 길에 액을 쫓는 지푸라기 뱀을 흔들흔들 흔들면서 어머니에게 그림 선생과의 인연을 들려주자 오타미가 소박하게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 그렇게 그림을 좋아했었니?"

"잘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좋아만 하는 거예요. 도로 씨 다음에는 이렇다 할 스승님께 배우지도 못했고요."

“그러고 보니 요즘도 가끔 끙끙거리면서 뭔가 그리곤 하던데.” “예에."

“도구나 그림 재료는 어떻게 하고 있니?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아까 그 쇼분도에 이것저것 주문하면 좋지 않을까?"

그림 재료는 저한테 아까워요, 어머니." 하나야마 도로는 예전에도 이름난 화공은 아니었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듯 보였다. 도미지로와는 형편이 다르다.

한데 그로부터 며칠 후,

"근처까지 물건을 배달하러 온 김에 인사만이라도 드릴까 하고요."

하며 가쓰이치가 미시마야를 찾아왔다.

도미지로는 당황하고 말았다.

장사하는 상인과는 툇마루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충분하지만, 객실로 안내해 정중하게 대한 까닭은 역시 전 스승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미지로는 솔직하게, 지금 자신의 '손장난'은 흔한 반지에 그저 먹을 칠하는 수준으로, 아이가 판자담에 낙서를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미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장사꾼답게 가쓰이치는 도미지로의 당황한 얼굴을 부드럽게 흘려 넘겼다.

"공연히 마음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만 후지산 참배에서 뵌후, 도로 선생님이 매우 기쁜 얼굴로 도미지로 씨 얘기를 하셔서요."

내가 가르쳤을 때는 아직 애송이의 그림자가 남아 있을 나이였지만 그 사람에게는 독특한 재능이 있었네. 다른 제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지.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시마야쯤 되는 가게의 아들이 가게 일을 내팽개치고 그림의 길로 나아갈 리도 없겠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실력을 닦으면 꽃을 피울 수 있는 재능이라고 생각하는데.'

도미지로는 귀가 뜨거워졌다. 하나야마 도로가 정말로 그렇게까지 말해 주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쇼분도의 장사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가쓰이치가 이야기를 부풀렸다고 여기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가쓰이치가 돌아간 뒤에도 도미지로는 한동안 객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지금의 도미지로가 그리는 그림은 특이한 괴담 자리의 청자로서 그리는 그림이다. 원래부터 오래 놓아둘 생각도 없었다. '기이한 이야기책의 오동나무 상자 속에서 자연히 낡고 흐려져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며 그리고 있다.

만약 진짜로 그림을 그려 보면 어떻게 될까.

아니, 그릴 수 있을까, 자신이 제대로 된 스승 밑에서 실력을 닦으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장남인 형 이이치로가 있으니, 앞으로 도미지로가 부모님의 장사를 물려받는다 해도 그것은 분점의 형태가 된다. 이이치로가 물려받을 미시마야를 도우면서 서로 경쟁할 수 있을 만한 분점을 세우는 게 가능하다면 그 이상의 효도는 없으리라.

예전의 도미지로와 마찬가지로 '남의 집 솥 밥을 먹으며 수업 중'인 이이치로도 머잖아 집으로 돌아올 테니, 앞으로의 일은 그때 상의하면 된다고 여겼다. 지금의 빈둥거리는 생활은 막간의 즐거운 휴식 시간이다. 다른 인생을 고르다니, 그런 생각은 머리 한구석을 스친 적도 없다.

도미지로는 스물두 살, 다음 정월이 오면 스물세 살이 된다. 아버지 이헤에가 어머니 오타미를 아내로 맞은 나이다. 밤새 주머니를 만들고 낮에는 행상에 힘쓰며 언젠가 둘이서 가게를 갖자고 맹세했던 나이다.

이제부터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가다니. 상인이 아니라 화공이 되다니.

'너무 늦었지.'

도미지로는 중얼거리며 혼자서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자귀나무 꽃은, 낮에는 꾸벅꾸벅 졸고 있지요."

흑백의 방의 도코노마에 오카쓰가 자귀나무 꽃을 꽂고 있다. 해질 녘에 꽃을 피우는 자귀나무는 오전인 지금은 확실히 반만 피어있다.

"소서 무렵이 가장 보기 좋을 때이니, 아직은 봉오리도 어리답니다. 오늘 오실 손님이 젊은 분이라면 딱 어울릴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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